원수 흑월을 만난 <무장>의 주인공 권. 어떤 면에서는 빤하지만, 한편 두근거릴 수밖에 없는 장면이다.
[토요판] 위근우의 웹툰 내비게이터
<행오프>, <무장>의 김철현
<행오프>, <무장>의 김철현
현재 내가 재직 중인 <아이즈>에 에세이를 연재하는 <닥터 프로스트>의 이종범 작가는 언젠가 창의력에 대해 ‘멋진 작품들은 모두 흥미로웠다. 하지만 그런 작품들이 모두 새롭지는 않았다’고 말한 적이 있다. 나는 이것이 서사 장르에서 클리셰의 중요성에 대한 매우 명쾌한 설명이라고 생각한다. 가령 김용의 <사조삼부곡>의 세 주인공 곽정, 양과, 장무기는 모두 타고난 재능을 지녔고 기연으로 절세무공을 만나 막힘없이 터득해 당대의 고수가 된다. 새롭진 않지만, 누구도 이 작품이 무협지 역사상 최고로 재밌는 작품 중 하나라는 걸 부인하지 못한다. 클리셰는 기본적으로 사람들을 매혹할 만한 검증된 구조다. 현재 다음에서 <무장>을 연재 중인 김철현 작가는 이러한 클리셰를 상당히 능수능란한 호흡으로 다룬다.
그의 전작인 <행오프>에서는 평범해 보이지만 바이크에 천부적 능력을 지닌 주인공 한이든이 등장한다. 스스로는 그 재능을 잘 알지 못하지만, 자신을 질투하는 라이벌과의 대결을 통해 자신의 능력과 스피드에 대한 욕망을 자각하고 바이커로서 성장한다. 이러한 천재 주인공의 스피디한 성장 서사는 무협지와 <드래곤볼> 부류의 정통 소년만화에서 수십, 수백 번 반복된 구조다. 하여 이든이 프로 바이커를 꿈꾸는 성훈과의 첫 정식 레이스에서 승리하는 건 결코 놀랍지 않다. 대신 밉살스러운 성훈의 친구들을 통해, 코너링에 대한 성훈의 잘못된 레이싱 상식을 통해, 독자에게 이든이 이기는 모습을 보고 싶게 만든다. 예측과 기대가 일치할 때의 쾌감이란 생각보다 강하다.
아예 장르부터 무협에 복수라는 고릿적 소재를 다룬 <무장>이 흥미로운 건 그래서다. <행오프>가 흔치 않은 바이크라는 소재를 골랐다면, <무장>은 아예 장르의 원형을 보여주겠다는 선언 같다. 주인공 권은 형의 복수를 위해 높은 수준의 무예를 닦은 천재이며, 복수심에 시야가 좁아져도 불의는 넘어가지 못하는 성격이다. 여기에 더 강한 적을 만날 때마다 무공을 갱신하는 과정은 일본 소년만화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고려시대 노비의 난을 이끌었던 만적이 당대 최강의 무인이었고 권이 그 아들이라는 설정은 흥미롭지만 소위 ‘팩션’(faction)의 영역으로 나아가진 않는다. 다만 가상의 역사적 음모 안에서 고려와 거란의 고수들과 주인공 권이 엮여 합을 겨루는 과정을 좀 더 개연성 있게 보여줄 뿐이다. 싸움을 통해 더 강해지는 건 빤할지 모르지만, 적어도 작품 안에서 이유나 명분 없는 싸움은 없다. 강한 적을 만나 생사의 고비에서 더 강해지는 권의 주먹은 빤하되 후련하다. 그래서 김철현 작가의 작품은 앞서 말한 새롭지 않되 흥미로운 이야기의 좋은 예가 될 것 같다. 울고 싶을 땐 뺨을 때려주고, 상대방이 밉상일 땐 주인공이 시원하게 승리하는 것, 이 즐거움을 굳이 포기할 이유란 없지 않은가.
위근우 매거진 <아이즈> 취재팀장
위근우 매거진 <아이즈> 취재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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