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희의 중국영화 이야기2/로예 감독의 <여름궁전>
2006년 칸영화제 출품 당시 <여름궁전>(和園, Summer Palace)에 세간의 이목이 집중된 건 두 가지 이유에서다. 첫째, 베일에 싸인 6·4 천안문 사건을 이례적으로 다루었다는 점. 둘째, 남녀의 성기까지 노출시킬 정도로 파격적 베드신을 구사했다는 점.
정치와 성, 두 영역에서 ‘금기’를 깨뜨렸다. 그런데 무성했던 소문을 뒤로하고 드디어 한국에 소개되었을 때 관객들은 난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천안문 사건이 시종일관 스토리와 겉도는 건 접어두더라도, 끊임없이 펼쳐지는 섹스의 향연이 너무도 불편했던 거다. 이상하지 않은가. TV를 켜면 아이돌 소녀들이 초미니를 입고 나와 성행위를 연상시키는 춤을 춘다. 남녀노소 불문 온 국민이 즐거워한다. 그 선정성을 문제 삼는 건 아마 방송심의위원회 종사자거나 시대에 뒤떨어진 ‘꼰대들’일 것이다. 그런데 관객 리뷰를 뒤적여보면 ‘지겹’고, ‘지루’하고, 도대체 ‘재미가 없다’는 의견이 많다. 한층 수위가 높은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리하여 <여름궁전>은 최소한 한 가지 미덕을 지니게 되었다. 섹스(sex)를 전혀 섹슈얼(sexual)하지 않게 묘사한 재능. 일상화된 성 소비에 가한 낯선 충격. 그럼 이제 이렇게 물어야겠다. 로예(婁燁, Lou Ye) 감독은 6·4 천안문 세대를 회고하면서 왜 굳이 ‘성’을 전면에 내세웠던 걸까?
주인공 위홍은 고향인 투먼을 떠나 베이징행 기차에 오른다. 배시시 짓는 웃음. 남자친구와의 결별 따위는 아무렇지도 않다. 새로운 곳으로 낯선 사람들을 만나러 가는 지금 이 순간이 설렐 뿐이다. 찬란한 봄날의 교정, 어디선가 들리는 바이올린 선율, 도서관 가득한 책들, 강의 끝나고 마시는 차가운 맥주 한 병. 변방의 도시에서 꿈꾸던 세계다. 그런데, 위홍은 외롭다. 친구 리티, 그리고 애인 저우웨이. 예민하고 자의식 강한 위홍은 사랑하는 사람들마저 받아들이기 벅차다. 그들의 이물성, 타자성이 가시처럼 따갑다. 애인, 심리학과 교수, 타교 남학생들과 섹스를 하면서 자유분방한 흉내도 내보지만, 가슴 속 불안은 커져간다.
천안문 시위는 축제처럼 열렸다. 트럭 위에 올라탄 위홍이 간만에 즐거워한다. 옆에는 결별 선언한 애인이 있다. 하지만 괜찮다. 오늘은 ‘자유’와 ‘민주’라는 이름의 소풍을 가는 날이고, 그깟 사랑싸움이야 별 게 아니다. 그런데 분위기가 나날이 흉흉해진다. 계엄령 선포 뒤 천안문 광장에 들어선 군인들의 총에 대학살이 자행된다. 기록에 의하면, 당시 100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집결했으며, 사망자는 241명, 부상자는 7000여 명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중국 정부에서 발표한 공식수치일 뿐 실제 사망자는 2000~3000명을 초과한 것으로 보인다.
다시 ‘성’ 얘기로 돌아가야겠다. 어두컴컴한 기숙사에서 학생 간부의 눈을 피해 벌이는 섹스, 추적추적 내리는 비 속 유부남과의 정사, 화장실에서 우편 배달원과의 기습적 성관계. <여름궁전>에서 구현하는 교합 장면은 성에 관한 21세기의 자본적 소비양식을 벗어나지만 모종의 ‘소비’라는 점에서는 일맥상통한다. 출구 없는 사회였다. 문화대혁명 이후 초토화된 현실 속에서 중국 정부는 개혁개방을 선언했다. 하지만 빈부격차는 날로 심해지고 그 배후엔 공산당 고위 간부의 특권 행사와 부정부패가 만연했다. 참다 못한 대학생들이 천안문 광장에 모여 대자보를 붙이고 구호를 외쳤다. “권위주의 타파”, “경제 개혁”, “정치 민주화”, “언론자유”….
그러나 그 대답은 총성이었다. ‘국가전복을 꾀하는 폭도들’을 용인하지 않겠다는 단호한 의지였다. 소통이 불가한 자리에서, 더 나아갈 수 없는, 하지만 이미 돌아갈 수도 없는 자리에서 영화 주인공들은 섹스를 한다. 성 그 자체로서의 물적 행위가 아니라 혁명의 실패에 따른 ‘선택’이었다. 요컨대 그들은 성을 정치적으로 소비했다.
1989년 6월4일 이후, 네 명의 주인공은 전혀 다른 길을 걸어간다. 위홍은 대학을 중퇴하고 가난한 오피스 걸이 된다. 저우웨이는 베를린으로, 다시 충칭으로 유랑하며 이방인인 채 살아간다. 로티는 빌딩 위에서 투신자살한다. 그리고 로티의 애인이자 저우웨이의 오랜 친구인 루어구는 행방불명 된다.
한 교정을 거닐던 그들이 뿔뿔이 흩어지기까지 많은 시간이 흘렀다. 젊었던 그들은 중년의 나이가 되었다. 세기가 달라지는 동안 변하지 않은 게 있고 또 변한 것이 있다. 그들 얼굴 위에 새겨진 우울한 표정은 여전하다. 하지만 우울(melancholy)은 이제 우울증(depression)이란 병명으로 대체되었다. 캠퍼스의 고민이며 광장의 절망은 우울을 타당한 것으로, 인간적인 번뇌의 일환으로 이해하게 했지만, 21세기 정신의학의 발달은 우울함을 ‘장애’이자 ‘질환’으로, 따라서 치료를 요하는 증상으로 정의 내렸다. 위홍과 저우웨이가 통과한 건 우울이 우울증으로 전환된 시간이었다. 그들은 그렇게 위태로운 혁명의 시대와 고별하고 안온한 일상으로 착지했다.
중국의 위홍들은 어쩌면 오늘 신경안정제 한 알을 먹었을 것만 같다. 일터로 향하는 ‘정상인’ 무리에 합류하기 위해. 그런데 캡슐 하나로 그날의 기억은 치유될 수 있을까? 군인들의 검은 그림자와 광장의 붉은 선혈이 그렇게 지워져도 괜찮은 걸까? 엔딩 신에 떠오르는 주인공의 행복한 표정이 6월4일 이전의, 이제는 다시 되돌아갈 수 없는 날들의 얼굴이 나지막이 우리에게 묻는다.
이승희 李勝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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