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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영화·애니

‘북경 자전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나아간다는 것

등록 2016-08-26 14:56수정 2016-08-26 15:07

[이승희의 중국영화 이야기8] 왕샤오슈아이의 <북경 자전거>
‘북경 자전거’ 스틸컷
‘북경 자전거’ 스틸컷
처음 중국 땅을 디딘 게 1994년 겨울이었다. 그때 한 달 가량을 어느 중국인 선생님 댁에 머물렀는데, 매일 부질없이 걸어 다녔다. 높은 담벼락 사이로 좁은 골목을 걷다가 나처럼 부질없는 중국 할머니를 만나 수다를 떨기도 하고, 배고프면 허름한 식당에 들어가 만두를 사 먹고, 해가 저물면 대로변에 서서 집으로 돌아가는 중국인들의 자전거 행렬을 구경했다. 그러면서 이상하게도 평화로워졌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건 1994년 베이징을 채우고 있던 시간의 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느긋했고 천천히 움직였다. 어제와 같은 오늘, 오늘과 같은 내일을 그저 순하게 받아들일 뿐이었다.

지금의 베이징은 완연히 다르다. 시간의 결 따위, 외제 승용차의 경적 소리와 자욱한 매연에 뭉개진 지 오래다. <북경 자전거>(十七歲的單車: Beijing Bicycle, 2000)는 이전과 다른 시간, 즉 자본주의의 숨 가쁜 행렬에 들어선 사람들이 안간힘을 쓰며 적응해가는 이야기다. 돈의 위력을 갓 깨달은 순박했던 중국인, 그 마지막 자화상이 펼쳐진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베이징

구웨이는 시골에서 막 상경한 17살 소년이다. 요행히 택배 회사에 취직한 그는 가슴이 벅차다. 한 달만 일하면 회사에서 배급한 은빛 자전거가 자기 소유로 떨어질 터이고 차곡차곡 월급을 모으면 금방 이 도시에 터를 잡을 것만 같다. 그런데, 이게 점점 예상과 달라진다. 회사에선 차일피일 자전거 소유 이전을 미룬다. 설상가상으로 자전거를 도둑맞는다. 구웨이는 네온사인이 반짝이는 베이징 대로에서 별안간 갈 곳을 잃는다.

또 한 소년 지엔. 베이징 빈민가에서 태어난 그는 새어머니와 공부 잘하는 이복 여동생 덕에 천덕꾸러기 신세다. 우여곡절 끝에 은빛 자전거를 마련한다. 친구들이 부러워하고 예쁜 여학생까지 자신을 달리 봐준다. 그녀와 같이 호숫가를 달리니 온 세상이 내 것만 같다. 갑자기 찾아온 불청객, 구웨이. 자전거 임자를 자처하며 내놓으란다.

두 소년을 쫓는 왕샤오슈아이 감독의 시선은 절제되어 있지만 한편으론 다정하다. 그는 17살 소년들의 세계가 얼마나 치열하고 고달픈지를 이해한다. ‘자전거'라는 사소한 물건이 생사를 결정하는 심급이 될 수 있음을 동감하면서 자전거에 ‘자본'의 은유를 슬쩍 싣는다. 중국인들이 물질의 향락을 맛보았다. 마치 이브에게 사과를 건네받은 아담처럼. 사회주의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는 건 당연한 수순이다. 감독은 그들이 욕망의 비바람에 강타당하는 순간을 스크린 위에 오려 붙였다.

두 소년의 서사 사이로 언뜻 비치는 베이징은 리얼하다. 1992년 덩샤오핑이 ‘남순강화'-1992년 1월 말부터 2월 초까지 덩샤오핑이 천안문 사태 후 중국 지도부의 보수적 분위기를 타파하기 위해 상하이, 선전, 주하이 등 남방 경제특구를 순시하면서 더욱더 개혁과 개방을 확대할 것을 주장한 담화-를 통해 개혁·개방을 선언했건만, 사회 기층에 도달하기까지 시간이 걸렸던 걸까. 2000년에도 여전히 베이징은 남루하다. 지엔이 사는 쓰허위안은 더 이상 장이머우, 천카이거들의 그것처럼 고색창연한 유적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전통의 숨결이 새겨진 곳이 아니라 ‘가난' 그 자체로 표상된다. 한 공간 안에 여러 가구가 모여 살고 취사나 세면 같은 사적 행위까지 그대로 노출된다. 곳곳이 쓰레기 더미고 먼지투성이다. 지엔은 틈만 나면 지붕 위로 올라가는데, 가난에서 탈출하고픈 욕망에 다름 아니다.

‘북경 자전거’ 스틸컷
‘북경 자전거’ 스틸컷
계층의 탄생

1949년 건국 이후, 노동자·농민·군인 세 계급이 성골 지위에 올랐다. 견고했던 골품제도가 무너진 것은 1990년대 후반부터였다. 부자와 가난한 자의 격차가 전 중국 사회를 재편성했다.

구웨이는 구멍가게 담벼락 틈으로 부잣집 아가씨를 훔쳐본다. 이상한 일이다. 그렇게 근사한 양옥집에 살고 날마다 예쁜 옷에 구두로 치장하는데 늘 울상이다. 흐느적거리며 집안을 배회하는 그녀. 창문에 비치는 그녀 모습에 도무지 눈을 뗄 수가 없다. 형의 한마디. “너랑 부류가 달라. 넘볼 걸 넘봐.” 하지만 구웨이가 그녀에게 매료된 건 애욕 탓도 아니고 성욕 탓도 아니다. 넘어갈 수 없는 경계선 너머에 대한 선망에서다.

2013년 TV 드라마 <상속자들>이 한국에 이어 중국에서 선풍을 일으켰던 건 다분히 설정 때문이라고 본다. 회장님 아들과 가정부 딸내미의 사랑 이야기. 더 이상 애달플 수가 없다. 모름지기 사랑에는 장애가 있어야 제맛이다. 하지만 장담하건대 로미오와 줄리엣의 재탕은 흥행참패를 면치 못할 것이다. 가문의 원한은 고루하다. 이제 가장 막강한 장벽은 신분, 더 정확히 말하면 재력에 의한 계층 차이다.

<북경 자전거>가 독특한 건 반전이 있어서다. 어느 날 골목길에서의 작은 소란. 부잣집 아가씨가 자가용을 타고 온 모녀에게 호되게 당한다. 알고 보니 옆집 가정부였던 그녀. 주인이 외출할 때마다 부잣집 아가씨 놀이에 흠뻑 취했던 거다. 들통이 나서 끌려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카메라가 애처롭게 비춘다. 넘볼 수 없는 세상을 선망하며 맹목적인 날들에 휩쓸려간 건 구웨이나 그녀나 마찬가지였다. 우리에겐 그들을 가여워할 자격이 없는데, 자신이 무엇을 향해 달리고 있는지 설명할 수 있는 자는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북경 자전거’ 스틸컷
‘북경 자전거’ 스틸컷
공유

다시 두 소년에게로. 자전거를 분실 당한 구웨이, 어렵사리 돈을 모아 장물 자전거를 구입한 지엔, 둘은 각각 소유권을 주장한다. 지엔이 훔쳤을 거라 믿는 아버지는 자전거를 구웨이에게 돌려주지만, 지엔의 의리 있는 친구들이 가만있지 않는다. 공사장으로 끌고 가 흠씬 두들겨주는데……. 구웨이는 울부짖으면서도 끝까지 자전거를 놓지 않는다. 밤은 깊어가고 지쳐버린 아이들. 여기서 참으로 귀여운 해결책이 나온다. 하루씩 나누어 타기로.

두 소년은 매일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만난다. 처음엔 짜증 난 표정으로, 조금 귀찮아하다가, 어느 날엔가는 서로의 이름을 묻고, 급기야 잘 가, 라며 손을 흔들어주기도 한다. 흐뭇한 화해이다. 자본을 어떻게 공유할 것인가에 대한 감독의 답변이기도 하다. 허무맹랑한 유토피아적 발상으로 치부할 수도 있겠다. 하나 그러기엔 이어지는 장면들이 지극히 사실적이다.

은빛 자전거를 되찾았으나 지엔의 여자친구에게는 이미 다른 남자가 생겼다. 머리를 노랗게 물들이고, 손목엔 지샥 시계를 차고, 지포 라이터로 담뱃불을 붙이는 그 앞에서 지엔은 패배를 인정한다. 굴욕적이지만 어쩔 수 없다. 온몸으로 부티를 발산하는 그는 게다가 최고급 산악자전거까지 소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며칠간 끓어오르는 부아를 삭히던 지엔이 끝내 벽돌 한장을 들고 그를 찾아간다. 사고를 치고 만 지엔. 마지막으로 구웨이를 만나 세상 모든 걸 내려놓은 표정으로 자전거를 가지라고 말한다. 어리둥절한 구웨이는 기뻐할 틈도 없었다. 곧이어 달려드는 패거리에게 두 소년은 죽지 않을 만큼 맞고 자전거는 박살이 난다.

‘북경 자전거’ 스틸컷
‘북경 자전거’ 스틸컷
맞다. 중국영화는 지루하다. 직업상의 비밀이지만 숨길 수가 없다. 중국영화 한 편을 끝까지 보는 데는 다소 인내가 필요하다. 그러면서 중국영화를 놓을 수가 없는 건 종종 보석과도 같은 장면을 만나게 되기 때문이다. 내게는 <북경자전거>의 엔딩신이 그러하다. 구웨이가 망가진 자전거를 어깨에 짊어지고 베이징 대로를 가로지른다. 늘어선 차량 행렬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절망도, 희망도 없이 묵묵히 걸어갈 뿐이다. 지금 우리가 제대로 걸어가는 게 맞는지, 웅변조의 질문은 없다. 더 풍족해졌지만 덜 행복해진 게 아니냐는 감정적 토로도 없다. 그저 응시할 뿐이다. 모든 것을 잃어버린 소년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이승희 李勝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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