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경을 넘어선 사랑이 심금을 울리던 때가 있었다. 이미 오래전 얘기다. 국가 간 이동이 자유로워진 현대사회에서 국제연애나 국제결혼은 범상한 일이 되었다. 2008년 대만에서 개봉된 <하이자오 7번지(海角七號, Cape No. 7)>는 이 시대착오적 주제를 다시 꺼내 들었다. 게다가 식민시절 일본 남성과 대만 여성의 사랑 이야기다. 문제적이지 않을 수 없다. 총화 단결하여 식민지배에 맞서야 할 시국에 적국 남성과의 사랑이라니. 낙랑공주가 자명고 찢던 시대도 아닌데 말이다.
이 영화는 1940년대 대만 소도시 헝춘을 배경으로 한다. 일본에서 건너온 교사가 사고뭉치 소녀에게 끌리기 시작했다. 언제부터였을까? 화가 나서 개미들을 밟다가 또 깔깔대며 웃어버리는 소녀. 도무지 제멋대로고 예측 불가능한 그녀가 태양처럼 눈부시게 다가왔다. 일본인과 대만인이자 교사와 학생,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은 사랑을 키워나간다. 그러다 1945년, 일본 패전을 맞는다. 교사가 일본으로 소환되던 날, 소녀는 몰래 가방을 꾸려 집을 나온다. 하얀 모자에 원피스를 입은 소녀가 항구에 서 있다. 애타는 눈빛으로 교사를 찾는데, 교사는 소녀를 피해 홀로 배에 오른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교사가 죽은 후 발견된 7통의 러브레터가 60여 년 세월이 지나 어느덧 노부가 된 소녀에게 배달된다.
‘하이자오 7번지’ 스틸컷
대만과 한국은 식민 경험을 공유한다. 대만은 청일전쟁 이후 시모노세키 조약에 의해 일본 최초의 식민지가 된 이래 51년간 일제 치하에 놓여 있었고, 알다시피 한국은 1910년 한일합병부터 36년간 일본의 지배를 받았다. 그래서다. 식민국과 피식민국 간의 러브 스토리가 기이하게 비치는 것은. 한국에서 그러한 예가 있었던가?
1990년대 인기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에서 한일 간의 사랑이 에피소드처럼 삽입된 적이 있다. 우파 지식인 장하림은 유학 시절 일본 여성 가즈꼬와 짧은 사랑을 나눈다. 장하림이 학도병으로 끌려가자 오갈 데 없어진 가즈꼬가 경성의 본가를 찾아온다. 시어머니와 형님 내외에게 처음 인사하는 자리에서 인상적인 건 가즈꼬의 자태였다. 일본 여성이 한복을 입고 쪽을 지고 있었다. 하림의 형이 아주 나중에 장하림을 만나 가즈꼬 소식을 전하는 장면도 의미심장하다. “그 여자는 도무지 일본인 같지 않더구나.” 더할 나위 없는 호감의 표시였다. 한국 미디어에서 한·일간의 사랑은 반드시 전제조건이 필요했다. 일본인은 영적, 육체적으로 국적 세탁을 깨끗이 마친 후에야 비로소 사랑받을 자격을 얻었다.
그 이후로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합작영화 시장이 성황을 맞이하면서 한·중 톱스타들이 스크린 위에서 만났다. 2009년 <호우시절>의 정우성과 가오위엔위엔, 2010년 <만추>의 현빈과 탕웨이, 그리고 2014년 <제3의 사랑>의 송승헌과 리우이페이까지. 한국전쟁 기간 한반도에서 서로를 향해 총구를 겨누었던 사이다. 그런 한국과 중국도 연인 관계로 재회했건만, 한·일 간의 사랑은 거의 전례가 없다. 한·일의 사랑은 상상 가능한 영역을 넘어서는, 혹은 상상을 불허하는 영역의 결합이다.
그러니 비슷한 처지의 대만 영화 <하이자오 7번지>가 이색적일 수밖에. 식민국 남성과 피식민국 여성의 사랑, 그것도 60년을 한결같이 지속하는 사랑을 그렸는데, 이 ‘불순'한 주제로 최고의 흥행 기록까지 세웠다. 5개월 만에 약 200억 원의 수입을 올림으로써 <색/계>, <말할 수 없는 비밀>을 넘어서 대만 영화사상 가장 주목받는 ‘중어권(華語) 영화'가 되었다.
‘하이자오 7번지’ 스틸컷
“난 패전국의 국민이 되어 순식간에 귀족에서 전범으로 전락했지. 가난한 교사였던 내가 왜 민족의 죄를 짊어져야 하지? 시대를 잘못 타고난 걸까? 난 일개 교사일 뿐인걸. 널 사랑하지만 이제는 놓아줄게.”
일본남성이 대만에 두고 온 애인에게 전하는 메시지다. 이 대목에서 참 불편했는데, 그런 내가 스스로도 참 이상했다. 난 결코 민족주의자도, 애국자도 아닌 사람이기 때문이다. 피 속에 흐르는 식민의 기억 탓일까, 아님 반일 교육의 잔영일까. 분명한 건, 서사적 측면에서 도무지 감정이입이 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위의 대사는 내 안의 ‘가해자/피해자' 구도를 자극한다. 가해자를 용서하는 건 오롯이 피해자의 몫이다. 따라서 피해자가 용서하기 전에 구원받는 가해자는 분노를 일으킨다. 그런데 가해국 일본의 남성은 개인과 국가를 분리해냄으로써 구원의 명분을 얻었다. 아무래도 석연치 않다. 더 불가사의한 건 이 대사가 일본이 아닌 대만에서 흘러나왔다는 점이다.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한때 일본에서 인기몰이를 했다. 그 이유가 “목메어 불러 봐도 대답 없는 내 형제여, 돌아와요 부산항에, 그리운 내 형제여”라는 구절이 일본인에게 떠나온 조선반도에 대한 그리움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 소식은 우리를 불쾌하게 만들었다. 한국의 경우 식민시절에 대한 향수는 일본인에 의해 이루어지며, 한국인은 이를 격렬히 거부한다. 반면 대만의 경우 대만인 스스로가 식민시절을 애틋하게 회고한다.
이 차이는 어디서 나올까. 대만 역사의 특수성 때문이다. 대만은 17세기부터 스페인, 네덜란드의 치하에 있다가 200년간 청의 지배를 받은 뒤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역사, 그 자체가 식민의 연속이었다. 일본에서 해방된 1945년부터는 중화민국 관할이 되었으나 ‘진정한 해방'이라고 보기 어려웠다. 1947년 타이베이에서 2·28 사건이 벌어졌다. 대륙에서 넘어온 천이(陳儀) 행정부가 대만을 접수하는 과정에서 일으킨 유혈 진압으로 약 3만 명 이상이 살해, 실종되었다. 이는 한동안 금기의 사실이었다. 장기적 독재가 자행되는 가운데 대만사회에 억압과 공포가 만연했다. 1949년 선포된 계엄령이 1980년대 후반에 와서야 겨우 해제되었다.
지금까지도 대만 땅에서 외지인과 현지인은 첨예하게 갈등 중이다. 1945년 이후에 이주해온 이들을 ‘외성인'이라 칭하고 밍난, 학카스, 기타 원주민 등 본래 거주하던 이들을 ‘내성인'이라 일컫는데, 약 14%의 외성인이 고위 관직을 독점하며 대만사회를 움직여왔다. 다수의 대만인은 차라리 일본제국의 통치방식이 국민당보다 더 인간적이었으며 일본 관리들이 오히려 대만인을 더 존중해줬다고 여긴다. <하이자오 7번지> 엔딩신에서는 대만인과 일본인이 한목소리로 ‘들장미'라는 곡을 부른다. 일제 시기 일본군에 의해 대만에 널리 보급된 민족 가요다. 70여 년이 지났건만 일본인에 대한 대만인의 호감은 여전히 희석되지 않고 있다.
<하이자오 7번지> 삽입곡 ‘들장미'
얼마 전 한국 땅에서 어여쁜 대만 소녀가 곤욕을 당했다. 제14대 대만 총통으로 당선된 차이잉원은 “그 누구도 대만의 정체성으로 사과할 필요가 없게 하겠다”는 말로 취임사를 대신했다. 지난 6월, 파나마 운하 개통식에 참석한 차이잉원은 방명록에 ‘타이완 총통(President of Taiwan)'이라는 서명을 남겼다고 한다. 대륙에게 하사받은 이름, ‘중화 타이베이(Chinese Taipei)'를 거부한 것이다. 더 이상 중화인민공화국의 일개 도시, 혹은 지방 정부 수준으로 남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다. 식민의 기억보다 치열한 정치적 갈등이 향후 양안 관계에 어떠한 파장을 미칠지 주시해볼 일이다.
이승희 李勝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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