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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아시아·태평양

세계 최장기 해방투쟁 심장부에서 열린 ‘격정 비상총회’

등록 2018-06-23 19:14수정 2018-06-23 19:26

[토요판] 정문태의 국경일기
(20) 까렌민족해방군 본부 레이와
까렌민족연합에도 이제 세대 교체 바람이 불고 있다. 왼쪽이 해방군 제2세대인 무뚜세이뿌 의장이며 오른쪽이 제3세대인 부의장 끄웨뚜윈. 정문태
까렌민족연합에도 이제 세대 교체 바람이 불고 있다. 왼쪽이 해방군 제2세대인 무뚜세이뿌 의장이며 오른쪽이 제3세대인 부의장 끄웨뚜윈. 정문태

69년 동안 해방투쟁 벌인
소수민족해방 세력의 맏형
게릴라 1만여명 거느린
까렌민족연합의 근거지

7개 해방구서 모인 51명
총회 열어 대정부 의제 설정
군부 변화 기다리며 고단한 회의
중앙상임위 첫 촬영 ‘행운’

타이 북서쪽 국경도시 매홍손에서 오른쪽으로 버마 국경을 끼고 지방도 108을 따라 남쪽으로 163㎞를 달려 매사리앙에서 숨을 돌린다. 매사리앙을 질러 흐르는 유암강둑에서 커피로 점심을 때우고 지방도 105를 타고 남쪽으로 233㎞ 떨어진 중북부 국경도시 매솟으로 간다. 이 국경 길이 제 아무리 아름답다손 치더라도 숱한 고개를 오르내리는 400㎞를 8시간쯤 달려 매솟에 닿으면 그 뒤는 뻔하다. 몸도 마음도 녹초, 이제 쓰러질 일만 남았다.

6월19일 아침 7시, 전화가 울린다. “문태, 점심때 쯤 사람 보낼 테니 준비하고 있게.” 까렌민족연합(KNU) 부의장 끄웨뚜윈 말이 잠결로 흐른다. 닷새째 퍼붓는 국경의 비는 헤어나기 힘든 잠을 부른다. 1시30분, 끄웨뚜윈이 보낸 자동차를 타고 지방도 105를 타고 왔던 길을 되돌아 북쪽으로 달린다. 타이와 버마의 까렌주 국경을 가르는 모에이강을 끼고 130㎞쯤 달리면 강둑에 까렌민족해방군(KNLA) 본부인 레이와로 들어가는 ‘개구멍’이 나타난다. 여기는 타이 국경수비대도 없는 무인지대다. 타이 정부가 눈감아 준다는 뜻이다. 보통 땐 20m 남짓한 모에이강 폭이 장마철로 접어든 탓에 100m쯤으로 크게 불었다. 수줍은 아이처럼 살랑이던 물결은 온데간데없고 소용돌이까지 일으키는 거센 황톳물을 흘려댄다. 건너편 까렌 진영에서 한 전사가 몰고 온 배를 타고 국경을 넘는다.

젊어지는 레이와

대물림해 온 전설 ‘흐르는 모래 강’을 쫓아 고향을 고비사막쯤으로 여겨 온 까렌 사람들은 현재 까렌주에 500만, 타이에 100만, 그리고 유럽을 비롯한 곳곳에 150만이 살고 있다. 까렌이 언제부터 버마에 삶터를 다졌는지 알려진 바는 없지만 소수민족으로서 비극의 뿌리만큼은 현대사에서 찾을 수 있다. 까렌과 까친을 비롯한 소수민족을 앞세워 다수 버마인을 지배한 영국 식민주의자의 이른바 분할통치가 악의 씨를 뿌렸다면,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립 보장을 미끼로 소수민족들 도움을 얻은 영국 식민주의자의 무책임한 약속이 거름 노릇을 했다. 1948년 버마가 독립하면서 소수민족들이 자치와 독립을 외치게 된 까닭이고 이게 오늘까지 이어지는 분쟁의 싹을 틔웠다.

그 역사의 텃밭에서 까렌민족연합이 줄기를 뻗었다. 1947년 창설한 까렌민족연합은 무장조직인 까렌민족해방군을 이끌고 1949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69년 동안 세계 최장기 해방투쟁을 벌여왔다. 그 사이 까렌민족연합은 소수민족 해방군 동맹체인 민족민주전선(NDF·1976년 창설)과 버마민주동맹(DAB·1988년 창설)을 비롯해 망명 정치조직과 무장조직 연합체인 버마연방민족회의(NCUB·1992년 창설)의 줏대로서 버마 정부에 맞서왔다. 말하자면 20여개 웃도는 소수민족해방군과 망명 민주혁명 세력의 맏형 노릇을 해온 셈이다.

까렌민족연합 중앙상임위원회 비상총회가 열린 레이와 본부. 정문태
까렌민족연합 중앙상임위원회 비상총회가 열린 레이와 본부. 정문태
2012년 까렌민족해방군과 버마 정부군이 휴전협정을 맺은 뒤론 발길을 끊었더니 레이와도 그 사이 몰라보게 달라졌다. 선착장에서 3㎞쯤 떨어진 산속에 300여 명은 족히 앉을 만한 대형 강당과 50여명을 재울만한 숙소가 들어섰다. 휴전 전엔 상상도 할 수 없던 풍경이다. 까렌민족연합과 까렌민족해방군은 1995년 마나플라우가 버마 정부군한테 함락당한 뒤 제7여단 자리인 이곳 레이와로 본부를 옮겨왔다. 현재 7개 여단과 1개 특수대대 소속 1만 게릴라를 거느린 까렌민족해방군 심장이 뛰는 곳이다.

그 레이와가 오늘 뜨겁게 달아올랐다. 까렌주 7개 해방구에서 모여든 중앙상임위원 51명이 지난 18일부터 22일까지 닷새짜리 비상총회를 열고 있다. 51명이 차례로 나서 목소리를 높이는 회의장은 한마디로 격정적이다. 이런 토론은 중앙집행위원 예닐곱 지도부가 몰고 온 국경 소수민족 정치판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풍경이다. “다가오는 버마 정부와 회담에 대비해 의제 설정과 정치적 결정을 하는 자리다.” 까렌민족연합 부의장 끄웨뚜윈(64)이 귀띔해 준다. 사실은 레이와로 오면서부터 내 관심은 사전 보도할 수 없다는 회의 내용보다 까렌민족연합이 이 예민한 정치적 계절에 초대 약속을 지켰다는 점이다. 그동안 까렌민족연합은 언론뿐 아니라 바깥사람들한테 중앙위원회 비공개 원칙을 지독하게 우겨왔다. 애초 끄웨뚜인은 “회의는 비공개·비보도다”고 거듭 말했지만, 정작 나는 아무런 눈총도 받지 않은 채 회의장 안팎을 자유롭게 드나들었고 사진도 맘껏 찍을 수 있었다. 그 덕에 까렌중앙상임위원회 사진을 찍은 첫 기자가 되었고, 오랜만에 반가운 얼굴들을 만나는 기쁨도 덤으로 얻었다. 이처럼 변한 건 레이와 풍경만도 아니었다. 그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도 바뀌고 있다. 아주 보수적이었던 까렌민족연합 지도부가 서서히 젊은 세대로 넘어가면서 변화를 몰고 온 게 아닌가 싶다.

군부 변해야 버마 변한다

이제 남은 건 버마 정부를 쥐고 흔드는 군부다. 2011~2012년 버마 정부와 소수민족해방군들은 개별 휴전협정을 맺은데 이어 2015년 전국휴전협정(NCA)까지 맺었다. 그럼에도 다음 단계인 정치회담을 통한 민주연방 창설로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한 건 ‘조건 없는 회담’이라는 대원칙을 어긴 군부 탓이다. 까렌을 비롯한 소수민족 해방세력들은 지난 3년 동안 정치회담을 손꼽아 기다려왔다. 버마 사회의 두 기본 모순인 이 소수민족 문제와 민주화 문제를 풀지 않고는 내일이 없다는 게 지난 70년의 교훈이다. 국경 소수민족해방 세력들은 일찌감치 모든 준비를 마쳤다. 군부가 변해야 버마가 변한다. 오늘 레이와도 바로 그 군부의 변화를 기다리며 고단한 회의를 하고 있다. 나는 오늘 레이와에서 그 역사가 돌아가는 현장을 내 눈으로 바라본 엄청난 행운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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