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일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자유민주당(VVD) 총선 파티 무대에 마르크 뤼터 총리가 올라 기뻐하고 있다. 헤이그/AFP 연합뉴스
지지자와 당원이 들어찬 건물 로비로 뻗은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마르크 뤼터 총리가 내려오기 시작했다. 2016년 그래미 시상식에서 올해의 앨범상을 받은 마크 론슨의 노래 ‘업타운 펑크’가 경쾌하게 울려퍼졌다. “내 이름을 외쳐봐, 너도 날 알 테니, 난 ‘핫’하니까.” 빠른 리듬의 노래 가사는 그의 얼굴에 가득 찬 안도의 웃음과 절묘하게 겹쳐졌다.
네덜란드 총선 투표가 끝난 지 2시간여 뒤인 15일 밤 11시15분(현지시각) 헤이그 세계무역센터. 이곳에 차려진 온건 보수파 자유민주당(VVD)의 총선 파티 무대에 뤼터 총리가 올라섰다.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와 도널드 트럼프(미국 대통령) 당선 이후 이어지던 ‘잘못된 포퓰리즘’을 네덜란드가 멈추게 한 밤이다. 투표율도 높았다. 민주주의 축제다.”
그가 엄지손가락을 추켜올리자 파티장의 함성이 다시 올라갔다.
전 유럽이 주목한 이번 네덜란드 총선에서 뤼터 총리가 이끄는 자유민주당이 150석 가운데 33석을 얻어 유럽에서 극우 흐름의 확산을 차단하고 제1당을 유지했다. 1당을 넘보던 ‘네덜란드의 트럼프’, 헤이르트 빌더르스 대표가 이끄는 극우 자유당(PVV)은 20석을 얻는 데 그쳤다. 자유당은 2012년 총선 때보다 5석을 더 얻었지만 지난 1월 여론조사에서 30석 안팎까지 예상됐던 기세에는 훨씬 못 미쳤다.
반면, 극우 광풍의 대척점에서 또 다른 바람막이를 자임한 녹색좌파당(GL)은 기존 4석의 군소정당에서 14석으로 도약해 각각 19석을 얻은 중도 성향의 기독민주당(CDA)과 민주66당(D66)에 이어 제5당으로 약진했다. ‘네덜란드의 트뤼도’로 불리는, 30살의 예서 클라버르 대표를 내세운 녹색좌파당은 수도 암스테르담에서는 28개 정당 가운데 가장 높은 득표율(19.3%)을 얻는 등 돌풍을 일으켰다. 결과적으로 이번 선거의 ‘태풍의 눈’이 극우 빌더르스가 아닌, 좌파 클라버르로 바뀐 셈이다. 그러나 자유민주당과 연합정부를 구성했던 또 다른 좌파인 노동당(PvdA)은 38석에서 9석으로 입지가 크게 좁아졌다.
이번 총선은 프랑스 대통령 선거 1·2차 투표(4월23일과 5월7일)와 독일 총선(9월24일)에 앞서 실시돼 극우 광풍의 유럽 상륙을 가늠하는 선거로 국제적 관심을 받았다. 하지만 넥시트(네덜란드의 유럽연합 탈퇴), 이슬람 이민자 금지, 이슬람 사원과 학교 폐쇄 등을 주장한 자유당이 비교적 큰 격차로 1당이 되지 못하면서 극우의 유럽 확산도 일단 주춤할 것으로 보인다.
이번 선거 결과는 난민·타종교(이슬람) 배제, 자국 우선주의라는 극우적 분위기를 뒤엎고 선거가 막판으로 들어서면서 결국 민심이 관용과 화합이라는 ‘네덜란드다운’ 선택을 한 것으로 풀이된다. 특히 유럽연합에 균열을 내려는 빌더르스의 발언에 위험성을 느낀 유권자들이 투표장에 적극 나선 것으로 보인다. 15~16도 안팎의 온화한 날씨 속에 치러진 이번 총선 투표율은 1986년(86%) 이후 31년 만에 최고인 82%를 기록할 정도였다.
헤이그 중심에 위치한 의회 인근 투표소에서 <한겨레> 기자와 만난 스테파니 룰란트(22·대학생)는 자유당을 반대한다며, “이번 선거는 브렉시트를 결정한 영국, 트럼프를 택한 미국처럼 되느냐, 아니면 관용과 조화라는 네덜란드의 가치를 유지하느냐를 결정하는 중요한 선거”라고 말했다. 같은 투표소에서 만난 빌럼 스프라윌(37·공무원)은 “자유당처럼 증오를 확산하는 대신, 네덜란드가 유럽연합 멤버로 평화롭게 함께 사는 게 필요하다”고 이야기했다.
빌더르스의 주장을 ‘혼돈’(카오스)으로 규정하고 상대적 안정감을 내세운 뤼터 총리의 전략도 막판에 주효했다고 현지 언론은 평가한다. 뤼터의 자유민주당은 선거 당일에도 <헤이그 쿠란트> 등 모든 지역신문에 “브렉시트와 같은 혼돈, 해법 없는 거친 주장”을 내세운 빌더르스를 택할 것인지, “안정적 정치와 건강한 경제”를 이끌 자유민주당을 선택할지를 묻는 광고를 한 면 전체에 냈다.
기존 집권당인 자유민주당이 또다시 1당이 됐지만 지난 총선에 견줘 8석이 줄어든데다 기존 연정 파트너였던 노동당도 크게 의석이 줄어 자유민주당은 다양한 이념 성향을 지닌 정당들이 동거하는 ‘대연정’에 나설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 1당이 된 자유민주당이 자유당을 연정 파트너로 삼지 않겠다고 밝힌 만큼 기독민주당·민주66당·녹색좌파당·노동당 등 온건 보수부터 좌파 정당까지 모두 연정 대상으로 떠오르고 있다. 다당제인 네덜란드는 150석 가운데 과반인 76석을 넘길 수 있도록 총선 이후 보통 2~5개 정당이 연정을 구성하는 게 일반화돼 있다.
빌더르스는 “우리를 연정에서 배제하면 (자유당은) 더 강한 야당이 될 것이다. 뤼터와의 대결은 끝나지 않았다”고 말했다. 헤이그에서 만난 빌더르스 지지자인 캐서린 반데로스(57·숙박업)는 “결과에 좌절하지 않는다. 기존 집권세력에 실망한 우리의 생각과 빌더르스의 주장을 주류 사회에 던진 것만으로도 성과다. 선거 기간 동안 자유민주당의 주장을 조금이라도 더 보수 쪽으로 이동시킨 것도 빌더르스의 영향”이라고 위안을 삼았다.
헤이그/송호진 기자
dmzsong@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