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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공동체엔 자격이 필요하지 않다

등록 2021-06-20 13:20수정 2021-06-21 02:39

김여사의 어쩌다 마을
이십대 청년이 ‘김여사의 어쩌다 마을’을 먼저 읽고 그리다. 장태희
이십대 청년이 ‘김여사의 어쩌다 마을’을 먼저 읽고 그리다. 장태희

3년 전, 하나짱은 중대 결심을 했다. 동네책방의 제안을 받아들여 서울 유명 학원의 강사 생활을 접고 책방 직원이 되기로 한 것. 마을에서 먹고살 수 있을까? 서점은 다 망한다는 시절에 서울도 아니고 파주의 작은 동네책방에서 말이다. 게다가 그녀는 외국인이다. 그리고 3년이 지났다. 지금 그녀는, 꽤 잘 해내고 있다.

일본인 여성 하나짱은 우리동네 협동조합 책방의 유일한 직원이다. 6년 전 한국인과 결혼한 뒤 남편 직장 가까운 파주로 왔다. 일본에서 초등학교 교사로 5년간 일했고, 서울 유명 학원 강사로도 일했다. 어쩌다 동네책방 직원이 됐을까? 아이를 키우다 보니 그림책에 관심이 많단다. 동네 도서관이 마중물이 됐다. 그림책으로 다문화를 이해하는 강의가 있어서 들으러 간 게 인연이 됐다. 마침 프로그램 담당 사서도 아이 키우는 여성이었다. 같은 처지라 통하는 게 많았다. 아이 옷도 나누면서 소소한 유대가 이어졌다. “도서관이 제게 말을 걸어준 게 참 고맙고 행운이라고 생각해요. 외국인이라고 특별하게 대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나를 인정해주었어요.” 사서도 마을살이에 관심이 많던 터라 자연스레 마을로 스며들 수 있었다. 책방에서 일본어 강좌를 열게 된 계기다.

그녀의 수업은 인기가 무척 많았다. 유쾌하고 열정적인 강의에 소문이 나서 사람이 자꾸 늘었다. 서울 출퇴근에 육아까지, 힘든 그녀에게 조합에서 제안을 했다. 아예 책방 직원이 돼서 강좌를 진행하고, 같이 마을살이를 해보면 어떻겠냐고. 둘째도 계획 중이던 하나짱은 제안을 받아들였다.

동네가 직장이 되니 시간도 절약하고 아이를 맡기지 않아도 되니 좋았다. 수업도 틀에 박힌 게 아니라 자기만의 색깔로 다채롭게 꾸릴 수 있었다. 일본 전통시 하이쿠 쓰기를 해본다든가, 말차, 화과자를 곁들여 진짜 일본의 문화를 체험한다든가, 무척 풍성해졌다. 이웃들과 맛집도 다니고 소풍도 즐기면서 진짜 마을사람이 됐다.

작년 4월 책방에서는 하나짱의 둘째 딸 돌잔치가 열렸다. “코로나로 못 하겠지 생각했는데, 책방에서 돌잔치를 열어줬어요. 어떤 조합원은 딸이 제일 좋아하는 곰 세 마리를 축가로 연주해주셨고, 또 어떤 분은 사진을 찍어주셨어요. 돌잡이에, 풍선 장식에, 음식에, 잊을 수 없는 날이었어요.” 코로나로 지쳐가던 마을 사람들도 모처럼의 잔치에 신이 났다. 마스크 쓴 단체사진도 남겼다. 하나짱의 두 딸은 닫힌 어린이집 대신 책방에서 놀았다. “코로나 같은 위기에는 외국인일수록 더 기댈 곳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저는 참 운이 좋았죠.”

하나짱이 책방 직원이 되면서 마을과 유대가 없었던 결혼이주여성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국적도 몽골, 중국, 일본, 대만, 필리핀, 캄보디아, 베트남 등 다양하다. 그림책 놀이에 관심이 많고 다문화 강사 활동도 하는 이들이다. 요즘은 일주일에 한번, 아이들 재우고 밤 10시에 줌으로 모인다. 고민과 우정을 나누는 그녀들만의 소중한 시간이다.

“많은 한국 엄마들은 아이들 초등학교 때부터 학원 보내고 좋은 대학 보내려고 애쓰잖아요. 자유롭게 키우고 싶은데 고민이 많아요.” 학벌주의와 입시경쟁 사회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걱정이 많다는 하나짱이다. 교실 안에서 일어난다는 차별과 배제도 남의 일 같지 않다. 임대아파트에 산다고 차별한다는 뉴스를 보면서 하나짱의 아이들도 언제든 ‘이방인’으로 차별받을 수 있다는 두려움이 든다.

“꼭 한국어를 잘하고 한국 문화에 잘 적응해야 인정받을 수 있는 걸까요?” 얼마 전 이주여성 모임에서 나온 질문이란다. “처음에는 한국말이 서툴러서 잘 어울리지도 못하고 스트레스가 컸어요. 하지만 말이 좀 늘어나자 주변에서 ‘한국 사람 다 되었다’고 해요. 칭찬인 줄 알지만 저는 상당히 불편해요.” 다들 깊이 공감하는 분위기에 하나짱은 꽤 놀랐단다. “그동안은 저도 한국에 적응하려면 빨리 말 배우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언어를 잘 못해도, 사고와 생활방식이 좀 달라도 외국인의 정체성 그 자체로 인정해주면 좋겠어요.”

국적으로 차별하고 시민권이 특권인 세상이다. 옳지 않지만 당장 바꾸진 못한다. 공동체의 성원이 되는 건 다르다. 아무 자격도 필요하지 않다. 국적도, 성적 지향도, 장애 여부도 상관없다. 비슷한 부류만 모이는 폐쇄적인 공동체는 즐겁지도 않고, 건강하지도 않다. 하나짱은 요즘 ‘하나짱의 반짝반짝 책소개’, ‘반짝반짝 인터뷰’ 같은 책방 유튜브 프로그램도 열심히 진행하고 있다. 그녀와 아이들이 다양성이 존중받는 세상에서 함께 반짝반짝 빛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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