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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슬픔도 힘이 된다. 마을에서라면

등록 2022-07-24 18:18수정 2022-07-25 02:35

이십대 청년이 먼저 읽고 그리다. 장태희
이십대 청년이 먼저 읽고 그리다. 장태희

김여사의 어쩌다 마을

지난주 친정엄마가 퇴원해서 집으로 왔다 . 교통사고로 반년 가까이 병원에서 지냈으니 퇴원은 기쁜 일이다 . 숨 쉬는 것 빼고는 뭐 하나 자기 힘으로 할 수 없으니 절망이 앞선다 . 엄마는 연신 “내가 바보가 되어버렸다 ”며 한숨을 쉬었다 . 나도 슬퍼졌다 .

엄마는 지난겨울 발목이 부러지는 큰 교통사고로 수술을 받고 재활병원에 6개월이나 머물렀다 . 그 정도면 웬만큼 일상에 적응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 각고의 재활치료 끝에 조금씩 걷고 움직일 수 있게 됐지만 , 대신 일상의 다른 기능들이 거의 ‘붕괴 ’됐다 . 냉장고를 여는 것도 , 창문을 여닫는 것도 제힘으로 못한다 . 육체의 근육이 퇴화하고 , 생활의 감각들이 사라졌다 . 회복된 만큼 퇴행이 진행된 엄마는 ‘아기 ’가 됐다 .

병원 생활이 길어진 것은 병원의 안전함과 재활치료에 대한 기대 때문이었다 . 엄마의 허약하고 노쇠한 육체가 버티려면 쾌적한 실내환경과 , 24시간 돌봐줄 안전한 시스템이 필요했다 . 반년 전,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 대학병원의 담당 의사 생각은 달랐다 . 매달 진료받으러 갈 때마다 의사는 의아한 눈빛으로 묻곤 했다 . “집에서 생활하시면 더 빨리 회복할 텐데 왜 재활병원에 계세요 ?” “병원에서 재활치료를 받으셔야 회복도 빠르고 안전하니까요 .” 변명처럼 대답하면서도 속으로는 반문했다 . “참 편하게 말씀하시네요 . 집에서 모실 수 있으면 좋지요 . 여건이 안 되는데 어떻게요 ?”

연로한 어르신을 집에서 돌보려면 여러 조건이 갖춰져야 한다 . 우선 집이 넓고 안전해야 한다 . 연립주택 , 단독주택보다 엘리베이터 있는 아파트가 좋다 . 가까운 곳에 여러 종류의 병원도 있어야 한다 . 이런 주거 조건은 대개 자산 능력과 비례하기 마련이다 . 무엇보다 늘 돌볼 수 있는 사람이 반드시 필요하다 ! 누가 ? 결국 가족 , 그중에서도 여성이 맡게 된다 . 예전에는 주로 며느리 , 요즘은 딸이다 . 이들이 감당해야 하는 수고와 경력단절을 포함한 고통에 대해서는 구구절절 말하지 말자 . 그마저 안 되면 간병인이나 요양보호사의 도움을 빌려야 하는데 이때 감당해야 하는 경제적인 무게는 웬만한 중산층도 버겁다 .

병원을 선호하는 또 다른 이유도 있다 . 노인장기요양보험을 이용할 수 있거나 자동차 사고인 경우 집보다 병원이 경제적 부담이 오히려 적다 . 집에서 모시면 먹는 것 , 병원비 , 약값 등 많은 비용을 감당해야 한다 . 자동차 사고라면 병원에 있으면 모두 보험 처리가 되지만 , 집에 있으면 자부담이다 . 이래서 ‘사회적 입원 ’이라는 말이 나온다 . 질병 치료가 아니라 생활과 요양을 위해 병원에 입원하는 경우다 . 이제 병원은 여러 이유로 살러 가는 곳이 되고 있다 . 급속한 고령화와 가족 부담의 가중 탓에 병원이 불가피한 선택지가 되는 것이다 .

어찌해야 할까 ? ‘커뮤니티 케어 ’(지역사회 통합돌봄 )라는 말이 떠오른다 . 몇년 전부터 정부가 고령화사회 대응을 위해 추진하고 있는 방향이다 . 지역사회에서 요양 , 간호 등의 돌봄이 유기적으로 이뤄진다면 엄마도 끼니 걱정 , 치료 걱정을 덜면서 집에서 안전하게 지낼 수 있지 않을까 ? 돌봄을 맡은 나도 일상과 ‘헤어질 결심 ’을 하지 않고서도 감당할 수 있지 않을까 ? 지역이 돌봄의 터전이 된다면 모두의 삶의 질이 나아질 텐데 아직은 요원하다 .

제도적 대안이 마땅치 않아도 우리는 살아야 한다 . 지역 기반의 소소한 나눔의 가치가 더욱 절실해졌다 . 거동이 불편한 엄마에게 당장 필요한 건 욕실에서 안전하게 쓸 수 있는 노인용 목욕의자다 . 노인에게 가장 위험한 곳 중 하나가 미끄러운 욕실이다 . 좀 쓸 만한 의자는 20만원 가까이 줘야 하는데 ‘당근’으로 단돈 1만5천원에 샀다 . 덕분에 엄마는 무더운 여름 , 안전하게 씻고 쾌적한 생활을 할 수 있게 됐다 . 말동무가 될 인공지능 스피커도 ‘당근’에서 1만원에 샀다 . 80살을 바라보는 엄마는 예상과 달리 디지털 기기와 금방 친해져 “헤이 카 ○○ ,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를 읽어줘 ” 등 수준 높은 요구까지 해내고 있다 .

좋을 때보다는 힘들 때 마을의 고마움이 깊어진다 . 마음 나누는 이웃이 모인 톡방에 하소연했다 . “엄마가 퇴원했어요 . 아기가 돼버려서 숨 쉬는 거 말고 아무것도 제힘으로 못하시네요 .” 릴라 언니는 비싼 샤인머스캣 한 상자를 현관 앞에 두고 갔다 . “어머니가 어서 회복되길 바라요 . 힘내요 ”라는 위로와 함께 . “내가 갈게요 . 뭐라도 도와줄게요 .” 하던 일이 어려워져 벼랑 끝에 서 있는 애라가 전한 말이다 . 그 마음이 사무친다 . 마을이 치료해줄 수는 없다 . 품어줄 수는 있다 . 슬픔도 힘이 된다 . 이런 마을 안에서라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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