굳이 여기에 덧붙인다면 입 다물고 듣기만 해야 할 식자를 ‘페미니스트 지식인’에 국한할 이유는 없다. 권력을 향해 뛰면서 물불 가리지 않는 헛말들을 쏟아내는 지식인 전체를 향한다고 봐야 할 것 같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회를 만드는 데 일조하는 우리 사회 식자들의 직무유기와 사회적 효용가치에 대한 사유의 지점을 들춰 보게 하는 대목들이 가득하다.
조은 ㅣ 사회학자·동국대 명예교수
후줄근하고 핫한 이슈들이 지천으로 깔린 시점에 한가한 소재를 꺼내 든다. 글을 읽는 여정에서 줍게 된 낙수다. 질식할 것 같은 ‘뻔뻔한 말’들을 밀어내며 읽게 된 책이 있다. 이집트의 여성 작가 나왈 알-사으다위의 소설 <제로 점에 선 여인>(이하 <제로 점> 약칭)이다. <세계문학의 가장자리에서>(현암사, 2014)라는 책 안에 들어 있는 오카 마리 일본 교토대학 아랍문학 교수가 쓴 ‘제3세계 페미니즘과 서발턴’이라는 논문을 읽다가 이 소설과 만났다. 눈길을 끈 것은 이 소설에 대한 소개나 줄거리가 아니라 일본 독자들의 독해에 대한 저자의 비판적 사유였다. 소설을 제대로 읽어보고 싶어 열심히 찾았지만 우리말 번역본이 없어 <우먼 앳 포인트 제로>(Woman at Point Zero)라는 영역본을 구해 읽었다. 오카 마리의 논문에 나왈 엘 사다위의 <영점의 여인>으로 표기되어 있어 이 ‘영점’이 이집트어로 어떤 뉘앙스인지 궁금해하던 차 마침 방학을 맞아 서울에 온 아랍사회 전공 사회학자 하현정 교수에게 자문했다. 한국에서 자리 얻는 것을 포기하고 중국 듀크 쿤산대에 자리 잡은 하 교수는 학부에서 아랍어문학을 전공한 연줄을 십분 활용해 이를 답해줄 아랍어문학자들을 애써 찾아주었다. 아랍문학은 우리에게 <천일야화>가 아직도 가장 낯익고 영어나 일어 중역이 아닌 아랍어에서 바로 번역된 작품이 여전히 일천하다는 현실, 그리고 소수 교수로 명맥을 유지하는 대학의 아랍어문학의 현주소와도 맞닥뜨렸다. <제로 점>에 대한 논문을 한편 쓴 필자를 찾았는데, 김능우 교수는 서울대 인문대학 아시아언어 문명학부 강사로 본인을 소개했다. 국립 서울대에 정규 교수직 자리는 없이 아랍어문학 강의자 한명으로 강좌가 운영되는 모양이었다. 김 교수 논문의 용례를 따라 작가는 ‘나왈 알-사으다위’로, 작품명은 <제로 점에 선 여인>으로 쓰게 되었다.
<제로 점>은 영국의 출판사가 2006년 발행한 <죽기 전에 꼭 읽어야 할 책 1001>(이하 <책 1001>)에 포함되어 있을 만큼 세계문학계에 알려진 책이며 <책 1001>은 우리말로도 번역 소개되었다(마로니에북스, 2007). 거기에 소개된 한쪽짜리 줄거리가 우리말로 읽을 수 있는 <제로 점>의 전부다. 참조로 덧붙이자면 <책 1001>에 포함된 우리나라 작품은 박경리의 <토지>와 조정래의 <태백산맥> 두편이다. <제로 점>의 서사 구조는 간단하다. 아랍어로 ‘천국’을 의미하는 피르다우스라는 이름을 가진, 그러나 그 이름과는 정반대의 삶을 살게 된 사형수 여성의 인생 역정이다. 화자는 2명인데 1장과 3장의 화자는 여자 수감자를 상담하고 분석하는 정신과 의사이고 2장의 화자는 순박한 농민의 딸에서 거리의 여인이 되고 권력자 남성들을 쥐락펴락할 만큼 성공한 뒤 그 권력의 정점에 있는 뻔뻔한 포주를 살해한 혐의로 사형 집행을 기다리고 있는 사형수다. 그녀는 사형을 면해주겠다는 밀려드는 호의도 뿌리치고 대통령의 특사 청원도 거부한다. 교도소의 정신분석 전문의 접견 요청도 거들떠보지 않는다. 흐트러짐 없이 고개를 빳빳이 세운 여자 사형수가 있다는 교도관의 말을 들은 정신분석 여의사가 이 사형수를 면담하고 싶어 안달했지만 허사였다. “그녀(피르다우스)가 당신을 만나 줄 리가 없다”는 여성 교도관의 말을 들었을 때 여의사는 “정신분석이 뭔지도 모르는 무식한 자가 뭘 안다고”라고 생각하면서 자기가 얼마나 유명한지 몰라서일 거라고 스스로를 달랜다. 여러차례의 시도가 모두 무위로 끝나 포기하고 교도소 문을 나가려는 순간 무표정과 침묵으로 일관하던 피르다우스가 면담을 청한다는 교도관의 전언에 여의사는 흥분을 감추지 못한 채 단숨에 달려 들어간다. 독방을 찾아온 여의사를 피르다우스는 자기가 앉아 있는 차디찬 맨바닥에 앉게 한 뒤 “말은 내가 하겠다. 당신의 말을 들을 시간이 내게는 없다”고 못 박고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여의사가 눈을 감은 채 이야기를 듣다 말소리가 그쳐 눈을 떴을 때 피르다우스는 “갈 시간 됐어”라고 재촉하는 경찰관에게 둘러싸여 나가고 있었다. 정신분석의가 한 일은 몇시간 후 형장으로 사라질 피르다우스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본 것이 전부다.
오카 마리가 주목한 것은 세미나 등에서 이 소설을 읽혔을 때, 독자 대부분이 아랍·이슬람 사회의 가혹한 여성 차별의 실태를 페미니스트 작가가 고발한 작품으로만 읽거나 아랍사회의 가부장성을 유별난 듯 타자화시켜 읽는 일본 독자들의 경향이었다. 정신과 의사 출신인 작가가 페미니스트 지식인에 의해 여성/서발턴의 삶의 경험이 착취·억압되거나 타자화되는 데 대한 자기비판이라는 관점에 무게를 두는 오카 마리는 여의사에게 내 말을 가로막지 말고 듣기만 하라는 거리의 여인을 내세운 작가의 의도를 놓치는 점을 집요하게 잡고 비판한다. 요즘의 우리 상황 때문인지 권력과 돈밖에 모르는 그 정점에 있는 포주를 주저 없이 살해하고 “모기는 못 죽이지만 뻔뻔한 남자는 단숨에 죽일 수 있다”면서 고개를 빳빳하게 쳐들고 ‘말은 내가 하겠다. 당신은 내 말에 토 달지 말고 듣기만 하라’는 거리의 여인이 던지는 도도한 메시지를 어떻게 읽어줄 것인가가 숙제처럼 따라왔다. 굳이 여기에 덧붙인다면 입 다물고 듣기만 해야 할 식자를 ‘페미니스트 지식인’에 국한할 이유는 없다. 권력을 향해 뛰면서 물불 가리지 않는 헛말들을 쏟아내는 지식인 전체를 향한다고 봐야 할 것 같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회를 만드는 데 일조하는 우리 사회 식자들의 직무유기와 사회적 효용가치에 대한 사유의 지점을 들춰 보게 하는 대목들이 가득하다.
대학도 교수도 학자도 논문도 모두 구정물을 뒤집어쓴 것 같은 요즘 드물게 학자라는 타이틀에 거부감을 안 준 한 천문학자의 칼럼을 빌려와 ‘말하기’와 ‘읽어주기’에 대한 프레임과 용도를 곱씹으며 심란한 마음을 달랜다. ‘그 학생 “위성의 구덩이를 세는 중이야”’(<한겨레>, 2021년 7월9일치)라는 제목의 칼럼인데 필자가 몇년 전 해외 학회에서 만난 한 대학원생이 자신을 위성의 구덩이를 세는 중이라고 소개한 기억을 소환하고 “지구 표면에 대해서도 아직 완벽히 알지는 못하지만, 지구로부터 수억 킬로미터 떨어진 가니메데의 충돌구덩이를 세는 천문학자 하나가 존재한다는 것에 안정감을 얻었다”고 쓴 구절에 밑줄을 긋는다. 지구가 곧 망하지는 않겠다는 생각도 하고 우리 사회도 희망이 있는 구석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한다. 결과 격이 다른 시간을 사는 사람들에 대해 생각한다. 이들을 어떤 알레고리로 읽을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