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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각자의 속도는 달라도

등록 2021-08-08 20:31수정 2021-08-09 02:36

이십대 청년이 먼저 읽고 그리다. 장태희
이십대 청년이 먼저 읽고 그리다. 장태희

“미혜가 문학상 신인 부문에 당선됐어요. 뜻깊은 문학상에 응모한다길래 참여만으로도 의미가 있다고 격려했는데, 뜻밖에 큰 상을 받았어요.” 코로나로 마을살이도 시들어가던 무렵 애라가 반가운 소식을 전했다. 미혜는 마을의 몇 안 되는 전업주부다. 일을 가지려 애썼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았다. 일하며 바쁘게 사는 여성이 많은 동네다. “시간이 많으니 내가 할게요.” 미혜는 품은 많이 들지만, 빛은 안 나는 일을 자진해서 맡아주곤 했다. 마을의 회복탄력점 같은 존재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반짝였다. 그녀의 문학상 수상은 침체한 마을에 경사가 됐다.

시작은 3년 전 ‘역사동화작가’라는 작은 모임이었다. 마을의 중년 여성 10여명이 일제강점기에 일어난 일을 동화로 구성해 출간하기로 했는데, 운 좋게 기관의 지원을 받았다. 우리 마을 일 벌이기 고수인 애라가 주도했고, 전업 동화작가가 합류하면서 탄력이 붙었다. 작가가 되겠다는 거창한 꿈보다는, 동화가 친숙한 이들이 “애라 언니가 하는 일이니 믿고 해보자”는 소박한 마음이었다. 작가의 열정적 지도로 6개월 가까이 글쓰기 수업, 동화 창작, 합평, 수정 등의 작업을 거쳐 마침내 책이 나왔다. 게다가 동화에 들어간 그림은 아이들이 직접 그렸다. 엄마의 동화에 아이의 그림이 멋진 합작품이 됐다. “참여한 아이들에게는 오만원씩 사례를 했더니 쭈뼛하던 아이들도 신나서 열심히 했어요.” 그림 솜씨에 감탄하는 내게 애라가 귀띔한다. 물질의 유혹도 한몫했겠지만, 엄마와 함께한 작업은 아이에게는 영원한 추억이 되리라.

2년 차에는 한국전쟁을 주제로 책을 냈고, 3년 차인 올해는 이산가족을 주제로 책을 준비 중이다. 북한과 맞닿아 분단의 흔적이 곳곳에 산재한 파주에 맞춤한 주제들이다. 시야를 넓혀 한국에 사는 아프리카 난민 등 이산의 다양한 모습도 담는다고 한다. 전직 방송작가, 국어 교사 등 나름 글 좀 쓴다는 이들도 합류했다. 젊은 시절 문학을 꿈꾸던 이들도 소문을 듣고 문을 두드렸다.

출발은 소박했지만, 실력이 쌓이고 자신감이 붙자 작가 데뷔를 준비하는 이들도 생겨났다. 좀 더 강도 높은 수업을 통해 실력을 쌓고 싶은 이들과, 즐겁게 함께하는 데 의미를 두는 이들 간에 의견 차도 나타났다. “각자 준비해 온 작품을 읽고 평가하는 합평회를 할 때면 날카로운 긴장감이 감돌기도 해요. 서로의 글을 비평하다 보면 때로 마음을 다칠 때도 있어요.” 애라가 조심스레 말했다. 합평은 다른 이들의 시선을 통해 자기 글을 객관화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다. 하지만 ‘글’에 대한 비평이 자칫 ‘나’에 대한 공격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각자 상황이 다르다 보니 성장 속도도 다를 수밖에. 선희는 늦둥이를 출산하면서 한 해를 건너뛰었다. 기본기가 탄탄해 별 무리가 없을 거라 생각했다. “작품 초안을 가지고 첫 합평회 하던 날이었어요. 선희의 작품 초안이 좀 엉성했어요. 다른 사람들이 쑥쑥 성장할 때 선희는 한 해를 쉬었으니 공백이 컸던 셈이죠.” 지적보다 격려, 따뜻한 비판으로 그녀가 포기하지 않도록 애썼다. 작품을 제출하던 날 선희는 “글 작업을 하면서 나를 다시 들여다보게 되었어요. 나의 성격, 내가 살아가는 방식 등을 성찰하는 시간이었어요”라고 고백했다.

미혜의 문학상 당선으로 모임은 새로운 국면에 이르렀다. “미혜의 당선 소식이 모임에 자극을 준 것 같아요. 축하하면서도 긴장하는 분위기도 느껴졌어요.” 역시 조심스러운 애라의 전언이다. 모두 초보일 때는 같이 성장하는 것만으로도 즐겁다. 일정 궤도에 오르면 각자의 재능, 노력, 그리고 운에 따라 성장 속도가 달라진다. 그럴 때 위기가 닥치면서 잘되던 모임이 깨지는 경우도 많다. “마을이 아니었으면 이 모임도 위험했을지 몰라요. 하지만 마을에서는 어쨌든 같이 가는 게 중요하잖아요. 서로 속도가 달라도 존중하고 뒤처져도 지켜봐 주고.”

속도가 다른데 같이 간다는 건 어쩌면 모순 같기도 하다. 앞서가는 사람은 박수 받고, 뒤처진 사람은 낙오자, 탈락자가 되는 세상이다. 한번 낙오하면 다시 일어서기 어렵다. 성과를 최고의 가치로 치는 기업에서는 특히 그렇다. 남보다 앞서가라 독려하고, 뒤처지면 내친다. 그래야 더 큰 성과를 낼 수 있다며 서로 채찍질한다. 세상이 기업을 닮아간 지 오래다. 온 세상이 서로 성과를 내라며 다그친다. 하지만 마을에서는 같이 가는 게 성과다. 느린 사람, 낙오한 사람도 품는다. 그래야 같이 오래 살 수 있기 때문이다. 느리게 성장하는 이 늦깎이 마을 작가들이야말로 다른 가치를 증명한다. 그들을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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