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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이 마을 청년예술가들이 사는 법

등록 2021-11-07 16:09수정 2021-11-08 02:32

이십대 청년이 먼저 읽고 그리다. 장태희
이십대 청년이 먼저 읽고 그리다. 장태희

[김여사의 어쩌다 마을]

마을은 어른과 아이들의 공간이다. 젊은이들은 거의 없다. 있어도 어울리지 않는다. 이웃들은 서서히 같이 늙어가고, 그사이 자란 아이들은 떠난다. 어찌 보면 당연한 것도 같다. 마을은 좁은 곳, 젊은이들에겐 답답한 법이다. 그런 마을에 청년들이 나타났다. 동네 협동조합 책방에 모인 일곱명의 스물셋 동갑내기 여성들이다. 작년에 코로나 19로 대학이 비대면 강의로 전환하자 좀이 쑤신 이들이 알음알음 동네 책방으로 모였다. 공통의 관심사였던 생태환경과 채식에 관한 책읽기 모임을 시작하면서, ‘유수 ’라는 모임 이름도 지었다. “흐르는 물, 어린 나무, 영어로 청년을 뜻하는 유스 (youth), 그리고 분야에서 으뜸이라는 뜻도 담았어요.” 그리고 많은 일이 일어났다.

이 중 네명은 그림을 그린다. 지난봄에는 파주시에서 지원하는 지역정착형 청년일자리사업에 응모해 선정됐다. 이들이 지역을 살리겠다며 찾아간 곳은 전쟁 후 미군부대가 주둔하면서 집창촌이 형성됐던 곳이다. 이제 집창촌은 없어지고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이 많이 산다. 청년들은 예술로 마을을 살리겠다며 지난여름에는 해바라기 축제를, 가을에는 마을 카페에서 온라인 마을콘서트를 열었다.

책방을 근거지로 한 마을 기자단에도 참여하고 있는 스물셋, 무화의 이야기부터 들어보자. 무화는 지난달에 첫 개인전을 열었다. 임진강을 주제로 삼았다. 지금은 지역의 쇠락한 빈 상가를 활용한 전시회를 기획 중이다. 문화기획자이자 코디네이터로서 늘 바쁘다. 무화는 미대 진학에 실패했다. 그리고 한동안 미술을 포기했단다. “작년,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을 다룬 동화책에 삽화를 그려달라는 제안을 받았어요. 경력도 없는 무명 작가에게 제안을 해주셔서 참 고마웠어요. 다시 그림을 그릴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겼어요.” 제안한 이는 마을 기자단의 중년 선배, 애라였다. 1인 출판사를 경영하는 애라는 무화의 그림에서 가능성을 봤다. 작가도 성심껏 무화의 그림을 도왔다. 무화는 아예 지역 예술활동가로 살아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미대 3학년에 재학 중인 프세는 10년 넘게 살았어도 마을에 무관심했다. 코로나를 계기로 청년 모임에 참여한 뒤 지금은 지역에서 신나는 작당을 벌이고 있다. 얼마 전에는 직접 집필, 편집, 디자인까지 해서 책을 출판했다. 청년일자리사업으로 지난여름 6주 동안 지역의 고등학교 학생들과 함께 책을 읽은 것이 계기가 됐다. 책읽기로 끝내려니 아쉬웠다. 느낀 점, 바뀐 일상을 학생들과 함께 책으로 내고 싶어졌단다. “학생들이 작가가 되는 경험을 만들어주고 싶었어요. 독자들과 공유도 하고 싶었고요.” 꽤나 멋지고 근사한 책이었다. 내가 감탄하자 신이 나서 말한다. “책 디자인하는 동네 선배 다솜님의 도움이 컸어요. 궁금할 때마다 물어보면 바쁜 와중에도 살펴주셨어요.” 자비 출판할 요량으로 텀블벅 프로젝트를 기획했고, 마을 선배들, 친구들의 도움으로 130만원 정도가 모였단다. 그때 애라가 아예 정식 출판을 제안했다고. 상업성은 떨어지지만, 지역에서 성장하는 청년을 지원하고 싶어 손을 내민 것이다.

프세에게 어떤 그림을 그리고 싶은지 물었다. “이 도시의 사라지는 풍경을 담고 싶어요.” 이번의 빈 상가 전시회에서도 곧 사라져갈 것들을 그림으로 남기는 작업을 준비 중이다. 무화는 지역 상인들의 초상화를 소묘로 그리고 있다. 젊은이들이 이 도시의 사라지는 것들을, 그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을 그리고 있다.

얼마 전 이 청년예술가들이 책방의 선배들에게 협업을 제안했다. 마을잡지의 부록으로 다이어리, 달력, 엽서, 스티커 등 굿즈를 직접 만들자고. “제주의 아름다움을 담은 굿즈들이 부럽고 탐났어요. 파주에서도 만들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이왕이면 사람들이 자주 쓰는 유용한 걸로요. 그래서 다이어리를 생각했어요.” 제작비를 지원받기 위해 공공기관에 제안서 넣는 작업 등 궂은일은 마을 기자단 선배들이 도맡았다. “선배들 도움 없이는 불가능했어요. 사실 저희는 ‘얹혀 갔다 ’고 생각해요.” 그리고 굿즈들이 나왔다. 얼마나 예쁜지 모두 싱글벙글이다.

청년들이 살기 힘든 시절이다. 좋은 일자리가 적으니 공무원, 공기업같이 안정된 일자리에 매달리는 것도 당연하다. 코인 열풍도 이해가 된다. 우리 마을의 젊은 예술가들이라고 해서 저런 고민들이 없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이 청년 예술가들에게는 ‘뒷배’가 되어준 동네 선배들이 있었다. 일단 판이 깔리자 젊은 상상력과 활기가 지역에 가득 찼다. 선배들도 신이 났다. 이렇게라면 나이가 드는 것도 꽤 괜찮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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