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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딸들에게 돌봄의 윤리를 묻지 마라

등록 2022-03-06 17:58수정 2022-03-06 19:26

이십대 청년이 먼저 읽고 그리다. 장태희
이십대 청년이 먼저 읽고 그리다. 장태희

[김여사의 어쩌다 마을]

문화운동하는 정미 언니 주변에는 늘 사람이 많았다. 힘든 일이 생겨도 언니와 술 한잔, 수다 한판 나누면 그 넉넉한 품에 마음이 즐거워졌다. 업계의 ‘마담’으로 불리던 언니가 5년 전부터 거의 두문불출이다. 22년 전 뇌출혈로 왼쪽이 마비된 엄마를 독박 돌봄 하면서부터다. 요양보호사가 오는 서너 시간을 뺀 나머지 온종일, 365일의 간병이 오롯이 언니 몫이다. 뒤늦게 박사 과정을 마치고 논문만 남겨뒀는데, 논문은커녕 몇년 동안 일도 거의 못 했다.

언니는 50대 후반, 비혼의 비정규 대학 강사다. 아버지가 엄마를 간병하던 5년 전까지 노부모는 언니가 오는 주말만 기다렸다. 주중의 노동을 마친 언니의 주말은 반찬 만들기, 목욕과 산책시켜 드리기 등으로 꽉 찼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엄마 간병은 언니 몫이 됐다. “할 만큼 했잖아요. 이제 어머니를 요양원이나 주간보호센터에라도 맡겨야 하지 않을까요.” 안타까운 마음에 내가 말했다. “엄마가 거동도 불편하고 의사소통도 잘 안되는데 여전히 총명하셔. 치매도 아니고 정신이 또렷한 엄마를 시설에 맡기면, 우울증 걸려 돌아가실 것 같아.” 번듯하게 사는 남동생, 여동생은 왜 돌봄의 부담을 나누지 않는 걸까? “남동생은 지방에 사는데다 아이들이 어려. 하우스푸어라 들어가는 돈도 많고. 여동생은 시아버지 간병도 하고 있어.” 돌봄을 감당하기 어려운 저마다의 사정이 있다. 그 사정 다 배려하다 보니 결국 정미 언니처럼 착하고 약한 사람이 독박 돌봄 신세가 된다.

동네 절친 릴라 언니는 20대 젊은 나이에 엄마 간병을 떠맡았다. 엄마는 사람 좋고 무능한 남편 대신 가장 역할을 한 여장부였단다. 논에 물 대는 수로 확보가 농촌에서는 정말 중요한데, 엄마는 새벽같이 나가 원하는 곳에 웃통 벗고 버텨서 사내들을 제치고 좋은 자리를 차지하는 사람이었다. 엄마 나이 68살, 억척스레 일해서 빚도 다 갚고 살 만해졌을 때 교통사고와 후유증으로 고생하시다 세상을 떠났다. 왜 7남매 막내인 20대 딸이 돌봄을 책임져야 했을까? “언니들도 어려웠어요. 아이들은 어리고 무능한 남편 대신 먹고살려고 노가다 일도 했고요. 미혼인 내가 맡을 수밖에 없었죠.” 언니는 엄마 병원비와 생활비를 대느라 학원 강사, 방송 원고 작업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어느 날, 이렇게 살다간 내가 엄마를 너무 미워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친구들은 눈부시게 빛나는 청춘의 한복판에 있는데, 나는 추레한 모습으로 낙오되어 있는 거예요.” 언니, 오빠들 모두 힘든 상황이라 하소연도 못 한 채 6년을 간병했다. “몇년 전 셋째 언니가 그러는 거예요. 우리 막내가 20대에 어떻게 이 힘든 일을 했는지 중병에 걸린 가족을 간병하고 나서야 알게 됐다고. 둘이 끌어안고 펑펑 울었어요.”

나에게도 그 시간이 찾아왔다. 얼마 전 불의의 사고로 큰 수술을 한 엄마의 간병, 그리고 이후의 주거와 간병 계획 등 긴 돌봄의 여정이 시작됐다. 병원에서 간병하는 동안 ‘지금이라도 간병인을 고용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유혹’에 종종 시달렸다. 병원에 갇힌 채 해야 할 일들을 떠올리면 자꾸 우울해졌다. 나의 삶과 딸의 삶 사이에서 자주 흔들렸다. “그래도 내가 돌봐야 한다”는 간병의 윤리에 시달렸다. 사실 딸만의 고통도 아니다. 얼마 전 만난 남자 선배는 요양병원에서 돌아가신 엄마가 집에 가고 싶다고 했는데, 가족의 반대로 못 했다며 회한에 젖었다. “엄마를 생각하니 내 가족이 위태로웠고, 가족을 살리자니 엄마를 외면해야 했어.”

가족 내에서 돌봄의 책임은 대개 남성에게서 여성에게로, 기혼자에게서 비혼자에게로 떠넘겨진다. 안정된 정규직 직장 같은 돌봄 면제의 명분이 없는 한, 비혼이나 기혼의 딸이 맡게 된다. 전에는 며느리 몫이었다가 이제 딸로 넘어가는 추세다. 떠맡긴 남성이 속 편할 리 없다. 회한에 젖어도 답이 없다. 국가는 가족에게, 가족은 힘 약한 여성에게 돌봄을 떠넘기는 돌봄 지옥의 일방통행 경로를 뒤바꾸지 않는 한 답이 없다.

작년에는 20대 청년이 중병을 앓던 아버지를 간병하다 방치해 숨지게 한 ‘간병 살인’이 있었다. 답은 어디에 있을까? 장애인, 아픈 이, 노인들이 ‘요양병원·시설’ 대신에 ‘평소 살던 곳’에서 사람답게 살 수 있게 하는 지역사회 통합돌봄이 가야 할 곳이리라. 우리 공동체가 합의하고 각자의 형편대로 주머니를 열어야 가능한 길인데 요원하게만 보인다. 이 공백의 시간을 나이 들어가는 딸들이 늙은 엄마를, 부모를 돌보며 메우고 있다. 돌봄의 윤리를 나누자. 당신도 아프고 늙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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