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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강맑실 칼럼] 한반도가 맞이할 봄은

등록 2022-03-17 18:01수정 2022-04-04 17:59

분단 역사 70년이 넘었다.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위해 지혜로운 전략을 새로 짜야 할 때이다. 차기 정부가 한·미·일 3각 군사동맹에만 집착하고 사드 수도권 배치를 주장하면서 반공, 반북만 외치는 냉전시대의 낡은 작태에 머물 경우, 한반도를 어떤 구렁텅이에 빠뜨릴지 알 수 없다. 북쪽을 대화와 소통의 상대로 대하지 않고 붕괴시켜야 할 대상으로 보는 한, 우리에게 평화는 없다.

강맑실 | 사계절출판사 대표

2005년 5월5일은 사계절출판사의 오랜 소망이 이루어진 날이다. 벽초 홍명희의 <임꺽정> 10권에 대한 저작권 사용료 지급 건으로 <임꺽정>의 저작권자 홍석중 선생을 만났다. 1968년에 사망한 저자 홍명희를 대신해 저작권은 손자 홍석중 선생에게 있었다. 1985년 초판을 출간한 지 20년 만의 일이었다. 저자가 1948년 남북연석회의 참가차 평양에 갔다가 북에 남아 부수상까지 지냈다는 이유로 <임꺽정>은 출간 초기부터 시련을 겪었다. 우리나라 역사소설의 최고봉임에도 <임꺽정>은 지형과 책을 압수당하고 판매가 금지되었다. 사계절출판사는 1988년 국가를 상대로 행정심판과 민사 및 행정소송 등을 제기했다. 그리고 이듬해 정부로부터 판매금지 조치란 없다는 답변을 받아냈다. 이것이 하나의 판례가 되어 그때까지 판금에 묶여 있던 월북 작가들의 책이 빛을 보기 시작했다. 그 후 책은 자유롭게 판매할 수 있었지만 출간 후 20년이 되도록 저작권 문제를 해결한 방도는 없었다. 지구상의 그 어떤 나라와도 자유롭게 출판 계약을 하는 시대에 정작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한 민족끼리는 저작물을 주고받거나 계약할 경우 반국가 범죄 행위가 되는 모순된 세상에 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날 나는 일행이 직접 몬 승합차를 타고 육로를 통해 개성으로 향했다. 가는 내내 가슴은 요동쳤다. 개성에 도착해 홍석중 선생을 만났을 때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뜨거운 마음으로 얼싸안았다. <임꺽정> 사용료 지급은 그동안 제작·판매한 부수를 투명하게 밝히는 일이 관건이었기에, 나는 20년간 기록한 장부와 자료 등을 꺼내놓았다. 홍석중 선생은 그것들을 살펴볼 생각도 하지 않고 “강 대표를 믿지 무얼 믿겠습니까”라는 말과 함께 흔쾌히 우리 쪽 제안을 받아들였다. 분단의 장벽을 걷고 신뢰의 끈이 이어지는 순간이었다.

선죽교 바로 옆 자남산여관 회담장에서 맺은 협상은 그렇게 순조롭게 마무리되었다. 이듬해인 2006년 6월5일 평양 양각도 국제호텔에서 홍석중 선생과 다시 만나 ‘출판권 설정 계약’, 즉 저작권 계약을 체결했다. 남북 최초로 북쪽의 저작권자와 남쪽의 출판권자가 만나 이뤄낸 계약이었다. 2008년 출간한 <임꺽정> 4판은 비로소 저작권 문제를 해결한 판본이 되었다.

본격적으로 남북 교류의 물꼬를 튼 출발점은 2000년 6월 분단 이래 최초로 남북 정상이 평양에서 만나 채택한 6·15 남북공동선언문이었다. 선언문에서 남북은 “통일문제를 우리 민족끼리 자주적으로 해결할 것”과 “경제협력을 비롯해 사회 제반 분야의 협력과 교류를 활성화할 것”을 분명히 했다. 이후 남북 민간 교류는 비약적으로 활성화되었다.

남북경제문화협력재단을 비롯해 민간 교류 단체가 여럿 생겨났고, 인도적 지원이나 일회성 사업이 아닌 지속적 사회문화 교류를 위한 의미있는 활동을 시작했다. 2005년 7월에는 ‘6·15 남북공동선언 실천을 위한 민족작가대회’가 평양, 백두산, 묘향산 등지를 돌며 개최되었다. 또한 1988년 해금되었음에도 여전히 금기시되던 월북 작가들의 작품이 2005년 이후 저작권 계약을 맺고 출판이 가능해졌으며 심지어 교과서에 수록되기도 했다. 무엇보다 2007년 제정한 ‘겨레말큰사전남북공동편찬사업회법’은 국가 차원에서 법적 제도적으로 보장하는 남북공동사업의 첫 사례가 되었는데, 이후 남북 관계에 따라 수차례 중단을 반복하는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하지만 대북정책에 누구보다도 강경했던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서 남북 교류협력은 전면 중단되었다. 박근혜 정부는 급기야 개성공단을 핵·미사일의 자금원이라고 지목하면서 전격 폐쇄해버렸다. 이로 인해 남북 관계는 최악으로 치달았고 민간 차원의 교류는커녕 대부분의 대북사업 민간단체들이 북쪽과의 연락마저 끊어져 혹독한 냉전의 시대로 되돌아갔다. 이명박 정부조차 천안함 사건이 터지고 연평도에 포탄이 떨어지는 상황에서도 개성공단 폐쇄라는 극단적 조처로는 나아가지 않았다. 개성공단 폐쇄는 경제적으로든 군사적으로든 엄청난 긴장과 피해만을 안겨줄 뿐 어떤 효력도 발휘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남북 교류협력의 활성화를 위한 전망은 현재로서는 그다지 밝지 않다. 최근 러시아에 침공당한 우크라이나는 소비에트연방 해체 당시 독립국가를 선포하면서 배치되어 있던 소련의 핵탄두 1700여개와 대륙간탄도미사일 보유를 포기했다. 이런 우크라이나를 보면서 북은 어떤 생각을 할까. 미국이 주도하는 유엔의 대북제재는 선 핵폐기를 요구하고 있지만 북은 핵을 손에서 놓을 생각이 없는 듯하다. 현재의 제재 국면은 꽤 오랜 시간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이럴 때일수록 더욱더 남북이 독자적으로 취할 수 있는 교류협력의 방법을 모색해야 하지 않겠는가. 대북제재와 관련한 미국의 행정명령이나 유엔의 제재결의안의 문구에 대해 상대방의 유권해석만 기다리지 말고, 우리 정부의 독자적 해석에 의거해 제재 대상이 아닌 사안부터 찾아내어 남북 협력을 과감하게 실행해나가야 한다. 주권국가의 권리를 제대로 행사해야 한다.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은 북핵 문제와 남북 협력을 별개의 노선으로 바라보았고 참여정부 역시 그 궤를 같이하였다. 북한의 핵문제는 북-미 간의 문제이고 교류협력은 남북 간의 문제라는 소위 투트랙 전략이었던 셈이다. 따라서 2006년 북이 핵실험을 강행하여 미국의 부시 정부를 비롯한 국제사회가 강력한 제재를 운운하고 있을 때에도 정부는 민간의 남북 교류 정책을 유지했다. 반면 문재인 정부는 북한의 핵문제를 북-미 간의 문제로만 보지 않고 ‘한반도 비핵화’라는 대전제하에 남과 북이 함께 풀어야 할 공동의 과제로 껴안았다. 하지만 남북이 합의한 철도 연결을 비롯해 계획만 잔뜩 세워둔 공동사업들은 물론, 민간 교류를 어느 것 하나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전략적으로 어느 쪽이 옳았을까.

한반도의 분단 역사 70년이 넘었다.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위해 지혜로운 전략을 새로 짜야 할 때이다. 차기 정부가 한·미·일 3각 군사동맹에만 집착하고 사드 수도권 배치를 주장하면서 반공, 반북만 외치는 냉전시대의 낡은 작태에 머물 경우, 한반도를 어떤 구렁텅이에 빠뜨릴지 알 수 없다. 북쪽을 대화와 소통의 상대로 대하지 않고 붕괴시켜야 할 대상으로 보는 한, 우리에게 평화는 없다.

홍석중 선생과 자남산여관 회담을 마치고 헤어지던 날, 선생은 회담장 앞뜰에서 단풍나무의 여린 가지 하나를 꺾어 주며 말했다. “우리 다시 만날 때까지 건강합시다.” 단풍잎은 <벽초 홍명희 평전> 책갈피 속에서 이 봄에도 여전히 붉은빛을 더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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