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오피니언 칼럼

[강맑실 칼럼] 세계체제의 전환과 지정학

등록 2022-09-08 18:10수정 2022-09-09 02:37

미국과 중·러는 유라시아 장악을 위해 서로 다른 지정학적 전략을 펴가며 패권 투쟁을 벌이고 있다. 패권 장악을 위한 지정학적 전략의 근저에는 해퍼드 존 매킨더의 주장이 단단히 자리잡고 있다. <거대한 체스판>을 쓴 브레진스키도 매킨더 이론의 충실한 추종자다.

강맑실 | 사계절출판사 대표

소설 <눈먼 자들의 도시>를 보면 눈을 멀게 하는 전염병이 돌면서 가히 ‘포스트 아포칼립스’가 펼쳐진다. 포스트 아포칼립스는 핵전쟁이나 팬데믹 같은 대재앙으로 인한 문명 종말, 혹은 그 후의 세계를 다룬 사이언스 픽션이다. 지구촌을 휩쓸고 있는 코비드가 ‘치명적 감기’ 같은 바이러스가 아니라 ‘눈을 멀게 하는 전염병’은 아닐까 싶을 정도로 무언가가 사람들의 눈을 멀게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때로는 표면적으로 드러난 현상 밑에 웅크리고 있는 함의를 살펴 책을 펴내야 하는 나로서는 눈먼 자가 되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면서 이 글을 쓰는지도 모르겠다.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연속적인 미국 연방준비제도(연준)의 금리 인상 여파로 글로벌 경제위기가 대공황의 공포를 떠올리게 하고, 동아시아가 주전장이 될 전쟁 위기의 그림자마저 드리워지고 있다. 한국은 어느 나라보다도 경제와 안보 면에서 그 영향을 직접 받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세계체제도 변하고 있다. 미국 주도의 단일 체제가 아닌 나토를 중심으로 한 미국·유럽 대 중·러를 비롯한 브릭스(BRICS·‘브라질, 러시아, 인도, 중국, 남아프리카공화국’) 연맹체와 남미 세력 등 다원화 체제가 가시화하고 있다. 그동안 군사적으로 중립적 입장을 취해왔던 핀란드와 스웨덴마저 나토 가입 의사를 밝히고 있으나, 이란·사우디아라비아·튀르키예(터키)·인도네시아·이집트·아르헨티나 등 브릭스 연맹체에 가입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는 나라도 만만찮게 늘고 있다. 브릭스는 브릭스 플러스를 추진할 계획인데 아시아, 아프리카, 중남미 등지까지 가입에 긍정적이다. 여기에 러시아와 중국의 전략적 협력도 이루어졌다. 중·러 협력은 유라시아에 대한 미국의 지정학적 우위를 잃게 할 수 있고, 동시에 미국의 패권은 심각한 도전에 직면하게 될지도 모른다. 유라시아는 세계 인구의 75%, 에너지 매장량의 75%, 세계 총생산의 60%를 차지하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세계지도를 펼쳐 보면 유럽과 아시아는 하나로 연결된 거대한 섬과 같다. 반면, 미국은 따로 동떨어져 있다.

미국 위스콘신대학 역사학 석좌교수인 앨프리드 맥코이가 쓴 <대전환>에는 지난 70년간 미국이 세계 패권을 장악하기 위해 광대한 유라시아 대륙을 동서에서 어떻게 통제해왔는지 잘 드러나 있다. 미국은 대륙 서쪽으로는 유럽에, 동쪽으로는 한국과 일본 오키나와를 거쳐 필리핀까지 3천㎞ 태평양 연안에 군사기지를 확보해 북미 대륙 방어와 유라시아 대륙 통제를 위한 지정학적 거점으로 삼았다. 미국은 중국과 러시아 견제를 위해 그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나라들 전역에 미군기지를 800개 가까이 두고 있다. 그동안 수많은 나라가 엄청난 희생을 감수하면서 미국 패권 유지를 위한 대리전을 자국 내에서 치러야 했다. 대표적인 예가 1979년부터 십년간 지속된 아프가니스탄과 소련의 전쟁이다. 당시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의 안보보좌관이었던 즈비그뉴 브레진스키는 수십억달러를 투입한 비밀공작을 벌여 소련을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끌어들인 뒤 패망시키고, 동유럽을 소비에트제국에서 독립시킨 장본인이기도 하다.

대륙세력 당사자인 중국과 러시아는 유라시아의 패권을 위해 어떤 지정학적 전략을 세웠을까. 대표적 전략은 유라시아 대륙을 통합하는 물류와 에너지 인프라 구축이다. 이것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제2의 실크로드 구상이라 할 수 있는 중국의 일대일로 프로젝트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인도 뭄바이까지 이어지는 러시아의 국제남북운송회랑 프로젝트가 시베리아 횡단 열차와 연결되면 유라시아 전역을 잇는 거대한 인프라가 구축될 것이다. 이러한 프로젝트를 비롯해 중·러가 유라시아에 건설 중인 철도와 송유관과 가스수송관의 수는 실로 어마어마하다. 물류 인프라는 때로는 지배와 통제의 도구가 되기도 한다.

이처럼 미국과 중·러는 유라시아 장악을 위해 서로 다른 지정학적 전략을 펴가며 패권 투쟁을 벌이고 있다. 패권 장악을 위한 지정학적 전략의 근저에는 해퍼드 존 매킨더의 주장이 단단히 자리잡고 있다. <거대한 체스판>을 쓴 브레진스키도 매킨더 이론의 충실한 추종자다. 지난 5월 출판사 글항아리가 펴낸 <심장지대>라는 책을 보면, 매킨더는 1904년 발표한 ‘지리학으로 본 역사의 추축’이라는 글에서 ‘세계섬’(worldislands)과 ‘심장지대’, 심장지대를 둘러싼 ‘추축지대’라는 말을 처음 사용했는데, 그 후 지정학의 주요한 용어가 되었다. 매킨더는 아프리카와 아시아, 유럽을 따로 떨어진 대륙이 아니라 바다에 둘러싸인 하나의 거대한 ‘세계섬’으로 보았다. 매킨더는 또 다른 논문 ‘데모크라시의 이상과 현실’에서 심장지대를 지배하기 위해서는 동유럽을 먼저 지배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지정학의 유명한 명제 “동유럽을 장악하면 심장지대를 지배하고, 심장지대를 장악하면 세계를 지배한다”는 말이 여기서 나왔다. 이것은 미국과 러시아 양쪽 모두가 패권 장악을 위해 모토처럼 붙들고 있는 말이다. ‘제국주의 팽창의 억제’를 위해 내놓은 인식의 틀이 제국주의 팽창을 위한 이론으로 바뀌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매킨더의 통찰은 지리와 패권 사이의 인과관계에 관한 일반론을 도출해냈으며, 세계의 주요 분쟁을 유발한 지정학적 역학관계를 이해하는 데 놀랍도록 정확한 렌즈를 제공해주고 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 역시 지정학적 상황이 도사리고 있다. 미국과 서방은 유라시아의 심장지대에 대한 지정학적 포위망 구축을 위해 우크라이나를 나토에 가입시키려 하고, 러시아는 유라시아를 방어하기 위해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을 안보 위협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일주일이면 끝날 거라는 서방의 예측과 달리 전쟁은 장기전으로 치닫고 있다. 미국과 서방의 지속적 경제제재로 러시아는 오히려 서방에 의존하지 않는 자립적 경제력이 탄탄해졌을 뿐만 아니라, 앞서 말한 것처럼 중국과의 전략적 협력 체제, 브릭스를 중심으로 한 결속력을 강화하고 있다.

중국과 러시아가 유라시아를 세계섬으로 통합하는 데 성공할 수 있을지, 미국이 유라시아 대륙을 계속 통제할 수 있을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유라시아의 극동에 위치한 한국은 유라시아를 중심으로 벌어지고 있는 현대판 ‘그레이트 게임’과 세계체제의 전환 속에 도사리고 있는 거대한 지정학적 역학관계 앞에서 ‘눈먼 자’가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국익과 평화를 위한 제대로 된 대외 전략을 수립하기 위해 한국은 외교적으로 그 어느 때보다 절박한 시기를 맞고 있다.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오피니언 많이 보는 기사

윤석열이 연 파시즘의 문, 어떻게 할 것인가? [신진욱의 시선] 1.

윤석열이 연 파시즘의 문, 어떻게 할 것인가? [신진욱의 시선]

“공부 많이 헌 것들이 도둑놈 되드라” [이광이 잡념잡상] 2.

“공부 많이 헌 것들이 도둑놈 되드라” [이광이 잡념잡상]

‘단전·단수 쪽지’는 이상민이 봤는데, 소방청장은 어떻게 알았나? 3.

‘단전·단수 쪽지’는 이상민이 봤는데, 소방청장은 어떻게 알았나?

극우 포퓰리즘이 몰려온다 [홍성수 칼럼] 4.

극우 포퓰리즘이 몰려온다 [홍성수 칼럼]

‘영혼의 눈’이 썩으면 뇌도 썩는다 5.

‘영혼의 눈’이 썩으면 뇌도 썩는다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