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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강맑실 칼럼] 산이 남긴 것

등록 2022-10-27 18:34수정 2022-10-28 02:38

언제라도 자유롭게 오를 수 있는 천왕봉을 오를 수 없게 되었을 때 아버지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가을이면 억새 물결이 넘실대고 겨울이면 상고대 은세계가 펼쳐지던 정상이 부서지고 무너져 내리는 광경을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렇게 좋아하던 지왕봉 주상절리를 볼 수 없게 되었을 때, 분단 상황에서는 당연한 일이라 생각했을까.
서석대에서 바라본 무등산 정상. 멀리 천왕봉의 방공포대가 보인다. 사진 강맑실
서석대에서 바라본 무등산 정상. 멀리 천왕봉의 방공포대가 보인다. 사진 강맑실

강맑실 | 사계절출판사 대표

이른 봄에 떠났던 기러기들이 우리 마을 지산리에 다시 돌아왔다. 들녘은 추수가 끝나가고, 마을 정미소들은 바빠졌다. 긴 여정에 지쳐 강화해협인 염하강 갯벌에서 몸을 푼 기러기들은 추수가 끝난 들녘을 찾아 날아올 터이다. 아침저녁 차가워진 바람결에 이파리를 흔들며 기러기들을 홀로 맞이했을 나무들은 이제 몸을 키우는 동작을 멈추었다. 봄여름에 일찌감치 만들어놓은 잎눈과 꽃눈을 꽁꽁 감싼 채 새봄을 기다릴 것이다. 제 몫의 일을 마친 이파리들은 자신을 떨굴 준비를 서두른다, 찬란하게. 그 찬란함은 북쪽의 어느 높은 산 깊은 골짝으로부터 시작해 산등성이 숲들을 타고 남쪽 끝까지 불 일듯 번져갈 것이다. 내 아버지의 산, 무등산까지.

나에게는 아버지의 산이 있다.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언니 오빠들을 데리고 주말이면 오르곤 했다는 산. 철이 든 뒤에는 주말마다 아버지의 뒤를 따라 내가 올랐던 산. 골골이 아버지의 음성과 웃음과 손짓이 남아 있는 산. 오르막길 숲 바람 속에 아버지의 거친 호흡과 희열과 땀내음이 배어 있는 산. 식민지 시대에 태어나 기나긴 독재로 점철된 정권 뒤에 찾아온 민주주의를 잠시 맛보고 간 아버지의 역사가 돌부리마다 새겨져 있는 산.

주말 오후가 되면 아버지와 나는 시내버스에 몸을 실었다. 주어진 시간에 맞는 코스 출발지에 내려 무등산을 올랐다. 바람재나 세인봉, 아주 가끔은 장불재까지 오르거나 토끼재로 해서 동학사터 샛길을 걷곤 했다. 1187m라는 높이에 걸맞게 너른 품을 가진 무등산은 어느 길로 올라도 친절했다. 높고 큰 산이지만 가파르지 않고 푸근했다. 어쩌다 맘먹어야 오를 수 있는 산이 아니었다. 시내까지 내리뻗은 산등성이 때문에 동네 뒷산처럼 언제든 다가갈 수 있는 산이었다. 방학 때면 중봉이나 장불재를 거쳐 주상절리인 입석을 지나 서석대까지 올랐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서석대부터 인왕봉과 지왕봉, 그리고 정상 천왕봉까지는 오를 수 없었다. 출입이 금지됐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부터 나에게 무등산 정상은 서석대였다. 천왕봉까지 오를 수 없다는 걸 한번도 억울해하거나 안타까워해 본 적이 없다. ‘왜?’라는 의문도 가져보지 않은 채 당연하게 여겼다. 무등산 정상에는 언제나 군부대가 있어야 했다. 군부대가 없는 천왕봉은 나에게 상상할 수 없는 풍경이었다.

1961년, 광주시 소유인 무등산 정상부 부지를 공군이 무상으로 사용하면서 군부대 주둔을 위한 공사를 시작했다. 공사가 끝나자 1966년부터 방공포대가 주둔했다. 언제라도 자유롭게 오를 수 있는 천왕봉을 오를 수 없게 되었을 때 아버지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나처럼 당연한 것으로 여길 수는 없었을 터이다. 가을이면 억새 물결이 넘실대고 겨울이면 상고대 은세계가 펼쳐지던 정상이 부서지고 무너져 내리는 광경을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버지가 그렇게 좋아하던 지왕봉 주상절리를 볼 수 없게 되었을 때, 분단 상황에서는 당연한 일이라 생각했을까.

천왕봉 출입이 금지된 이후 연말이나 새해가 되면 언니 오빠들까지 동원되어 부대에 건넬 위문품을 배낭 가득 넣고 산을 올랐다. 위문품은 당시에는 비쌌던 설탕이거나 겨울양말이거나 간식거리 등이었다. 아버지가 부대장과 미리 전화로 이야기를 나눈 뒤 허가를 받고 준비한 것이었다. 군인 안내를 받아 세찬 겨울바람을 맞으며 민간인 출입금지 구역에 들어서면 아버지는 호흡을 고르며 천천히 걸었다. 지왕봉 주상절리 앞에 이르면 한참을 서서 육각형의 단호하고 꼿꼿한 바위들을 묵묵히 올려다보았다. 한없이 푸근해 보이기만 한 무등산이 신념처럼 단단하고 한결같은 묵묵함을 지니고 있다는 걸 확인이라도 하려는 듯. 구름 한점 없는 새파란 겨울 하늘은 쨍하고 깨질 듯 맑았다. 혹독한 추위와 칼바람에 바들바들 떨다가도 나는 눈앞에 펼쳐진 상고대에 넋을 잃었다. 도착한 부대 안은 따스한 온기로 가득했다. 난로 위 주전자에서는 물이 끓고 있었다. 위문품을 전달한 아버지는 부대장과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었고, 어색한 분위기가 싫었던 나는 창가에 서서 얼음 옷을 입은 창밖의 빛나는 나무들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정상 출입이 통제되던 무등산이 출입통제 61년 만에, 방공포대가 주둔한 지 56년 만에 전면 개방을 서두르고 있다. 군부대 이전지만 확정되면 속도를 낼 수 있다고 한다. 반세기 훌쩍 넘는 세월 동안 군부대를 둘러싸고 있던 면도날 철조망도 걷힐 것이다. 제 땅에서 뽑혔던 나무와 꽃과 풀들의 씨도 고향을 찾아 날아들 것이다. 양평 용문산이나 대구 팔공산처럼 정상에 부대가 그대로 주둔하면서 출입이 개방되는 것과는 성격이 다르다. 방공포대의 이전을 전제한 개방이라는 점에서 무등산 정상 개방의 의미는 크다. 군의 안보 시스템이 첨단화·다각화되어 방공포대가 꼭 산 정상에 있을 이유가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스물두개 국립공원 가운데 정상에 군부대를 이고 있는 곳은 무등산뿐이었기에, 산 정상의 생태까지 복원한다고 하니 참으로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나라에는 산봉우리에 군사기지나 군 통신시설이 들어선 산들이 참으로 많다. 강화도 고려산과 별립산, 파주 고령산, 감악산, 파평산, 의정부 천보산, 양평 용문산, 포천 국사봉, 연천 야월산, 군포 수리산, 수원 백운산, 인천 계양산 등과 동해안과 멀지 않은 태백 함백산과 영양 일월산 등을 비롯해, 과천 청계산, 춘천 대룡산, 대전 식장산, 대구 팔공산, 부산 해운대 장산 등 도시의 산들도 군사기지를 머리에 이고 있다. 어떤 산들은 정상 출입이 개방된 곳도 있고 어떤 산은 아직도 군 기지와 통신시설 등 보안시설 보호로 출입이 통제되고 있다. 전방과 그 부근 산처럼 절대적으로 군대가 주둔해야만 하는 산들도 있을 것이다. 그런 곳을 제외한 후방이라면 무등산이 방공포대 이전의 신호탄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남북 분단 아래서 우리는 국가안보를 이유로 권리와 자유를 알게 모르게 제약당하며 살고 있다. 도시의 산들에 방공포대가 들어선 196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철조망 설치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철조망은 군사분계선 인접 지역이 아닌 한강 하구를 비롯해 전국 해안과 강까지 뻗어 나갔다. 고양시와 김포시는 ‘주민과 관광객의 접근을 가로막고 국토 경관만 훼손’한다는 이유로 군과 협의를 거쳐 한강 하구 철조망을 단계적으로 제거해나가고 있다. 분단 상황이라는 이유만으로 반세기 넘게 당연하게 여겼던 시설들을 이제는 하나씩 뜯어내야 한다. 그것들이 제거된 땅을 걸으며 자유를 만끽하고 평화를 꿈꿀 수 있기를 바란다. 무등산 정상의 방공포대 이전과 한강 하구 등의 철조망 제거에서 나는 그 작은 씨가 꿈틀대며 움트는 걸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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