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성산읍의 중산간 마을 삼달리에는 ‘다방’이라는 이름을 가진 숙소가 있다. 장애인, 몸 아프고 마음 지친 이들이 찾아와 편히 머물 수 있는 곳이다. 사실 누구든 묵을 수 있다. 다방이라는 이름대로 온갖 부류의 사람들이 만나 뒤섞이는 열린 공동체다. 여기에 ‘이음돌’이라는 별채 공간이 있다. 중증장애인도 제주 한달살이를 할 수 있게 하자는 취지로 만든 곳이다. 3년 전, 뇌성마비 장애인 한명이 종잣돈 500만원을 기부한 게 계기였다. 그때부터 그는 ‘이음’으로 불린다. 길을 내며 살아온 사람, 규식이다. 지난달 초, 다방에 머물며 그를 만났다.
그는 어떤 사람일까? “1999년 어느 날 노들야학 학생이었던 규식은 혜화역에서 리프트를 타다 떨어져서 크게 다쳤다. 휠체어용 리프트에 올라타려던 순간, 앞바퀴가 리프트 바깥으로 나가버렸는데 안전판이 제구실하지 못했다. 서울교통공사를 상대로 오랜 손해배상소송 끝에 이기면서 혜화역에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었다.” 홍은전 작가가
‘혜화역 엘리베이터의 유래’라는 칼럼에서 소개한 바로 그 사람이다. “야학 수업엔 잘 나오지 않았지만 거리의 투쟁에는 혀를 내두를 만큼 성실한” 규식이었다. 그 바람에 부상을 달고 살았다. 지금 석달 예정으로 이음동에 머물고 있는데 싸우다 목뼈에 금이 간 탓이다.
말을 나눠보니 그와 나는 동갑에다 서울 태생이라는 점까지 같았다. 살아온 길은 많이 달랐다. 19살부터 29살까지 꽃 같은 청춘의 시간을 시설에 갇혀 지낸 그였다. 어떻게 시설에서 나왔는지 물었다. “너무 길어.” 짧은 대답이 긴 사연을 대신했다. 뚝뚝 끊기는 단답형 대답인데 무례하지 않고, 말 안 해도 통하는 오랜 친구처럼 격의 없이 느껴졌다. 벚꽃과 유채꽃 흐드러진 봄날, 이야기 나누며 걷다 보니 바닷가에 이르렀다. 걷는 데는 늘 자신이 있었지만 전동휠체어로 씽씽 달리는 규식을 따라가지 못해 헉헉댔다. 그는 에너지가 넘쳤다.
지난해 가을 다방에 머물 땐 발달장애인 화가 정은혜씨와 가족이 이음동에 묵고 있었다. 대학 졸업 뒤 갈 곳 없이 집 안에만 머물던 은혜씨는 틱, 조현증세 등으로 극심한 고통에 시달렸다. 그때 우연히 시작한 그림이 그의 삶을 구했다. 쉬운 과정은 아니었다. “은혜 혼자 그림 그리면서 사는 건 한계가 뚜렷해요. 장애인 작가들이 모여 자신들의 주파수로 소통하고 작업할 때 활력과 시너지가 생겨나는 게 보였어요.” 은혜씨 엄마인 만화가 장차현실씨는 아예 발달장애인들이 함께 모여 예술 활동을 하는 새로운 개념의 일자리를 만들기로 결심했다. ‘권리 중심 맞춤형 공공일자리 사업’이다. 작품과 같은 결과물이 아니라 예술 활동을 통해 자기를 표현하고, 이를 노동으로 인정해 임금을 지급한다는 놀라운 발상이다. 작가 5명이 출퇴근하고 활동보조인도 고용한다. 국회나 정치인이 아니라, 발달장애 당사자와 부모들이 싸우고 연대해 만들어낸 일자리다.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가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 지하철 시위를 ‘비문명적’이라고 비판하면서 장애인 이동권이 뜨거운 이슈로 떠올랐다. 장애인이라고 해서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줘서도 안 되고, 특혜를 요구해서도 안 된다는 이준석표 ‘공정’ 논리다. 규식이 혜화역에서 리프트를 타다 추락한 뒤 흐른 세월이 23년이다. 그사이 많은 장애인이 싸우고 다치고 세상을 떠났다. 출근 시간 30분이 늦어지면 화가 나는 건 인지상정이다. 장애인이 싸워온 23년을 알게 되면 미안해지는 것도 인지상정이다. ‘문명인’이라면 미안해할 줄 안다.
장애인이 이동하려면 세상이 먼저 이동해야 했다. 그동안 세상은 아주 조금씩 이동했다. 저절로 이동한 건 아니다. 규식은 세상에 없던 길을 냈고, 은혜씨와 부모들은 세상에 없던 일자리를 만들어냈다. 이들이 상처 입으며 낸 길을 따라 세상이 조금 ‘문명화’됐다.
규식은 주말에 부모님이 오신다며 들떠 있었다. 평생 가난과 고단한 노동으로 변변한 여행도 못 했을 두분께 소중한 시간을 선물하고 싶어 했다.
“말고기 장조림 할 수 있어요?” 전날 내가 준비한 음식이 입에 맞았는지 불쑥 물어 왔다.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란다. 소고기 장조림과 비슷하다는 말에 겁 없이 도전했다. 인터넷을 보고 서툰 솜씨로 만들었는데 맛도 괜찮았다. 닉네임 ‘이음’처럼 규식이 낸 길과 공간이 아픈 사람, 늙고 병든 사람들을 더 따뜻한 세상으로 잇는 길이 되면 좋겠다. 그 길 따라 더 많은 이들이 걷고, 저마다 새 길도 내겠지. 아픈 역사를 품은 4월의 제주는 참 아름다웠다. 아프게 낸 길도 그렇게 아름다우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