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구 논설위원
엄기영 <문화방송> 사장은 작고한 이득렬씨와 함께 우리나라 역대 뉴스 앵커 중 가장 인기가 높은 인물로 꼽힌다. 이씨가 수더분하고 서민적인 인상으로 시청자들의 사랑을 받았다면, 엄씨는 세련된 외모와 말씨 등을 강점으로 13년 넘게 최장수 앵커를 지냈다. 그가 문화방송 사장에까지 오른 힘의 최대 원천도 바로 앵커로서 쌓은 명성과 이미지였다.
지난해 2월 문화방송 사장 선임 때 당시의 방송문화진흥회(방문진)가 주목한 중요한 인선 포인트 중 하나는 권력에 대한 방어력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새 정권이 문화방송 장악을 시도할 게 분명한 상황에서 누가 권력의 압력에 가장 잘 버틸 것인가였다. 옛 방문진 이사 중 한 사람은 “엄기영씨는 문화방송의 상징적 존재다. 그가 버티면 정부여당이 함부로 손을 못 댈 것으로 봤다”고 말했다. 이념적 시비에서 자유로운 그의 온건한 이미지나 높은 대중적 인기 등에 비춰볼 때 격동기를 견뎌낼 최적임자로 봤다는 이야기다.
당시 방문진의 예측과 판단은 옳았을까. 현시점에서 중간결산을 한다면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린 것 같다. 최근 문화방송 방문진이 그에 대해 재신임 결정을 내린 것도 따지고 보면 그의 대중적 이미지나, 해임에 따른 정치적 부담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가 야당 후보로 지방선거에 출마하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라는 일각의 관측도 비슷한 맥락이다. 그 대목에서는 옛 방문진의 예측이 맞은 셈이다. 하지만 권력으로부터 문화방송 지키기라는 애초의 목표에 비춰보면 옛 방문진의 예상은 빗나가고 있는 느낌이다. 오히려 본말이 전도된 쪽으로 흘러가는 분위기다.
엄 사장의 이미지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부드러움이다. 흔히 강한 나무는 바람에 쉽게 부러지지만 갈대는 흔들릴 뿐이라고 말한다. 부드러움의 위대한 힘은 흔들리되 결코 굴복하지 않는 데 있다. 하지만 엄 사장의 경우 부드러움을 넘어서 유약으로 흘렀다고 말한다면 너무 가혹한 평가일까. 그는 권력의 압력에 정면으로 맞서기보다는 후퇴에 후퇴를 거듭했다. 그는 앵커 시절에도 미묘한 사안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밝히지 않는 성품이었다고 한다. 매사에 불분명하고 어정쩡한 태도는 사장이 된 뒤에도 변하지 않아 목소리를 내야 할 때 침묵했고, 원칙을 지켜야 할 때 타협하곤 했다. 그리고 오늘에 이르렀다.
그가 현재 겪고 있는 고뇌와 번민이 얼마나 깊고 복잡한 것인지를 헤아릴 길은 없다. 자신에게 쏟아지는 시민사회의 비판과 의혹의 눈초리가 억울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재신임 발표가 나온 뒤 그와 전화통화를 한 인사는 엄 사장의 발언을 이렇게 전했다. “15일 열리는 임시주총에서 새로 선임할 네 명의 이사 선택권은 내가 행사하겠다. 그 뜻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사표를 내겠다.” “마지막 선택이 임박했다”는 말도 했다고 한다. 결기에 가득 찬 그의 발언은 다소 뜻밖이 아닐 수 없다. 최근의 대체적인 관측은 엄 사장이 유임되는 선에서 권력의 섭정이 본격화될 것이라는 쪽에 모아지기 때문이다. 전화통화를 한 인사도 “뭔가 앞뒤가 잘 맞지 않는 느낌”이라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엄 사장은 앵커 시절 대형사건 등이 터지면 곧잘 “어처구니없는 일이 일어났습니다”라는 멘트를 날리곤 했다. 그 멘트는 아직도 문화방송 후배들 사이에서 그의 트레이드마크로 기억된다. 그런데 지금 문화방송에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수없이 일어나고 있다. 앞으로 그 강도는 더욱 세질 것이다. 그런데도 엄 사장은 판에 박힌 진부한 멘트만을 계속할 것인가. 아니면 그가 다짐한 대로 역사에 남을 ‘클로징 멘트’를 기대해도 좋은 것인가. 한번 유심히 지켜볼 일이다.
김종구 논설위원kj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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