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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이충걸의 세시반] 시력을 다친 남자가 세상을 바라보는 사적인 방법

등록 2020-10-04 15:32수정 2020-10-05 02:38

스무살 청년이 ‘이충걸의 세시반’을 먼저 읽고 그리다. 김예원
스무살 청년이 ‘이충걸의 세시반’을 먼저 읽고 그리다. 김예원

이충걸 ㅣ 에세이스트

태양이 미치도록 뜨거운 6년 전 여름, 편집실 창밖으로 보이는 빌딩의 세로 모서리가 구불구불 파형을 그렸다. 여느 때와 다른 형태를 묘사하자면 새로운 단어가 필요했다. 처음에는 지열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어른거리는 도시의 아지랑이는 어쩌면 낭만적인 잡소리였다. 다시 수직의 전봇대가 우툴두툴 사다리꼴 요철을 그렸다. 휴대폰의 네모 액정도, 잡지의 직육면체도 구름 속처럼 뭉개졌다. 나는 패닉에 빠지는 대신 차분히 추리했다. 이게 누군가의 장난이 아니라면 조금 피곤해서일 거야.

며칠 뒤 친분 있는 안과를 찾았다 검사를 마친 뒤 의사는 침울하게 휘둥그레진 눈으로 나를 보았다. 그리고 공포로 자욱해진 목소리. 그것이 시작이었고, 그 겨울, 국가 지정 공식 시각장애인 판정을 받았다.

나는 이 이야기를 자주, 탄원하다시피 반복해서 말했다. 이 황량한 어리둥절함을 동정받고 싶었다. 실질적으로 할 줄 아는 게 쓰는 것밖에 없는데 잘 안 보인다니, 나는 다리가 없는데도 트리플 토루프 점프를 뛰어야 하는 피겨 선수와 같았다. 모든 것, 모든 것이 바뀌었다. 친근한 건물들이 낯선 곳에 서 있었고, 거리의 표지판은 뿌연 수증기에 덮였다. 지표면이 들썩거려 걸음을 뗄 때마다 뒤뚱뒤뚱 중년 아기 코끼리가 되었다. 친구네 이자카야에 가려 해도 주변 구조물을 식별할 수 없어 가게 앞에서 번번이 헤맸다. 낮에는 빛이 망막을 파고들어 눈을 뜰 수 없었고, 저녁에는 조명이 각막에 가시 금을 그어 사방이 까맣게 보였다. 자주 부딪치고 수없이 다쳤다. 왼편 시각이 완전히 사라진데다 세로로도 잘려나가 ‘부드러운’ 피부라는 광고는 ‘드러운’ 피부로 읽혔다. 운전도 못 하고, 탁구도 못 치게 된 판국에 와인잔만은 제대로 잡는 내가 비듬보다 비루했다.

모든 것이 한순간 정상으로 돌아오리라고 믿었지만 시각적 인지 불능 상태는 나를 정신적 맹인으로 만들었다. 보통 나쁜 경험은 주변을 비틀어 세상과 나 사이에 배신의 다리를 놓지만, 나 자신에 대해서는 어떤 감각도 없었다. 나는 이상한 동물원에 있는 것 같았다. 아니, 전선이 마구 얽힌 싱크대 뒤에서 사는 한 마리 생쥐 같았다.

글을 쓸 수는 있었다. 모니터 글자 크기를 열 배로 키운다면. 그러나 커서를 찾을 수 없었다. 글을 읽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밤 같은 시야로는 십 분에 두 페이지도 못 넘겼다. 한 친구는 킨들과 오디오북을 권해주었다. 다른 친구는 시력을 다치면 오히려 다른 감각이 민감해져 소머즈처럼 잘 들을 거라고 다독여주었다. 어떤 친구는 눈 영양제를 한 아름 들고 와 나이팅게일처럼 안아주었다. 글을 읽는다는 것은 신체의 신경적 성향을 응용한 문화적 발명에 따른 것이겠으나 나는 자연선택 과정에 적응한 다윈이 아니었다. 내 처지를 감상적으로 다루는 것은 재미있었지만 그게 다였다. 병원은 망가진 시신경을 회복시킬 수 없었고, 친구들은 나의 눈이 될 수 없었다.

매 순간 천 개의 질문이 떠다녔다. 돌아가는 방법은 없을까? 종말까지 이런 눈으로 살아야 할까? 몸 전체가 환부가 된 엄마에게 투정 부리다가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나, 너무 안 보여서 너무 답답해. 답답해서 가슴살을 피가 나도록 뜯고 싶어.” 그때 엄마는 티슈를 뽑아 나에게 휙 던지며 말했다. “죽지 않은 걸 다행으로 생각해!”

나 자신을 소설 속 캐릭터처럼 제3의 관점으로 바라보며 행동 패턴을 감지하기까지 시간이 필요했는데, 내 상태를 인정하면서도 그것에 대항하는 괴로움은 충분히 나를 벌주었는데, 그 순간, 내 눈이 완전히 멀지 않았다는 걸 자각했다. 나는 손가락으로 공중에 단어를 따라 그려 보았다. 하늘은 파랗게 떠 있었고, 태양은 창틀 사이로 들어왔다. 나는 방백했다. 책을 아예 피하는 습관을 들이자. 내 머리는 평생 많은 것을 흡수했고, 말은 넘치도록 가득 찼어. 책을 더 읽으면 그만큼의 정보 조각이 메모리에서 지워져야 할 거야. 이제 글은 인식을 방해하는 기계, 차가운 무력함, 억울한 불명예일 뿐인걸. 그러나 새 습관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셰익스피어와 떨어져 있는 상태는 나를 가장 취약하게 만들기 때문에….

가끔 내가 글을 쓰고 책을 읽는 것은 현실도피의 한 형태라는 생각이 든다. 또는 20세기를 향한 동경일까. 결국 내 인생은 하찮은 글 하나를 상자 안에 넣고 트위터에 올리면 족할 것이다. 그 결과로 깊음이 어디 있는지 모를 것이다. 그렇지만 할 수 있는 한 오래 인생의 하찮음에 매달릴 것이다. 나는 결국 읽는 인간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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