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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김여사의 어쩌다 마을] ‘달리는 김마담’이 청와대 앞으로 달려가는 이유

등록 2020-10-11 18:32수정 2020-10-12 02:07

이십대 청년이 ‘김여사의 어쩌다 마을’을 먼저 읽고 그리다. 김우석
이십대 청년이 ‘김여사의 어쩌다 마을’을 먼저 읽고 그리다. 김우석

토마 피케티의 <21세기 자본>은 세계적인 베스트셀러다. 자본주의 불평등 300년의 역사를 분석한 800쪽의 방대한 분량이다 보니 연구자들조차 읽기 힘든 책으로 알려져 있다. 미국의 조사에서는 완독자가 2.4%로 모든 베스트셀러 중 가장 낮았단다. 이 책을 우리 마을 독서모임에서 올 상반기 6개월 동안 완독했다. 초로의 할머니부터 주부, 회사원 등 15명쯤이 매주 수요일 밤마다 모여서 읽었다. 동네 책방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모임 첫날 휴가를 내고 참석한 배달노동자 수철씨는 “책을 읽으면서 우리 아버지가 살아간 시대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어요. 그땐 몰라서 경제적으로 무능한 아버지와 불화하고 미워했던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모인 사람들이 숙연해졌다. 책을 함께 읽는다는 건 서로의 삶을 이해하고 생각의 지평을 넓혀가는 일이다.

경기침체로 자영업 폐업이 속출하는 마당에 외지고 조그만 동네에서 책방을 한다는 건 무모한 짓이다. 4년 전 마을사람 10여명이 책방 협동조합을 만들었을 때 이렇게 오래갈 거라고 생각하지는 못했다. 동네 마당발, 자칭 ‘달리는 김마담’이 앞장서서 이끌었다. 우리 부부도 합세했다. 작년 말 독자 공간을 갖게 되자 기획과 모임이 한결 풍부해졌다.

대형서점과 인터넷서점이 시장을 장악한 시절에 우리 같은 동네서점이 생존하기는 어렵다. 돈은 안 되지만 동네 책방을 유지할 때는 그만한 즐거움이 있는 법이다. 책만 파는 게 아니라 동네의 사랑방이자 지식문화의 거점 노릇을 한다는 보람이 있다. 거기다 코로나19 사태로 뜻하지 않게 새로운 가능성도 생겼다. 비대면 강의로 좀이 쑤시던 청년들이 한명 두명 책방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유치원이나 학교를 못 가는 아이들은 책방을 놀이터 삼았다. 사회적 거리두기 강화로 주춤했던 강연, 독서 모임 등은 줌을 비롯한 온라인 소통으로 더 활발해졌다. 경제사, 르네상스, 전염병의 역사, 음식문화사, 한자 강독, 일본어 공부 등으로 한 주가 꽉 찬다. 온라인 모임이 되자 동네 사람은 물론 서울과 여러 지역 사람들이 함께 소통하는 창구가 되고 있다.

책방은 작년에 예비 사회적기업으로 선정되면서 3년간 지원을 받게 됐다. 덕분에 직원을 둘 수 있게 됐는데 첫 직원은 아이 둘을 키우는 일본인 이주 여성이었다. 일본에서 초등학교 교사를 하다 한국인 남성과 결혼해 우리 마을로 이사 왔다. 그녀 덕분에 일본, 필리핀 등 이주민들이 책방을 찾았고 책방은 자연스레 다문화가 어우러지는 공간이 되었다. 작가와 동네서점 지원 프로그램 덕에 책방에 상주 작가도 생겼다. 경력단절 중장년층 여성들이 작가의 도움을 받아 자기 이야기로 책을 만드는 도전을 시작했다. 올겨울 출판될 예정이다.

20대 초반의 청년 직원도 생겼다. 코로나로 일할 기회를 잃은 청년들에 대한 한시 지원 정책 덕이다. 이 직원과 마을잡지 기자단의 20대 막내 기자가 의기투합해 청년모임을 만들었다. 우연히 책방을 찾은 동네 20대들도 합류해서 7명으로 불어났다. 특별한 목적도 계획도 없지만 하고 싶은 일들을 이야기하고 나누는 것만으로도 신이 난다. “우연히 모였지만 다들 지역에서 커서 그런지 평소에도 지역에 애정이 많았어요. 40대 이상이 중심이 되다 보니 우리들이 낄 자리가 없었는데, 이제 뭔가 도모할 수 있어 진짜 행복하고 좋아요”라며 청년 직원이 말했다. 그들이 기지개를 켜자 마을에 생기가 돈다.

정부가 도서정가제 폐지를 추진한다는 소식이 들리면서 동네 책방들에 위기감이 팽배해 있다. 정부는 책을 더 저렴하게 제공해 소비자 후생을 높이려는 것이라고 강변한다. 책은 상품일까? 가격을 달았으니 맞다. 하지만 다른 상품처럼 1+1 행사를 한다고 더 팔리지 않는다. 공공도서관이 대량으로 구매해서 공짜로 빌려준다. 책방이 항의하기는커녕 오히려 협업한다. 세상에 이런 상품이 어디 있을까? 책은 거기 담긴 의미와 가치 덕에 가격을 단다. 그래서 문화공공재다. 의미와 가치를 할인하자는 주장이 후안무치하다.

책이 담은 의미와 가치가 사람들의 삶과 만나는 교차로가 동네 책방이다. 소설가 정유정은 “도서정가제는 작은 출판사와 동네 책방들을 살리는 최소한의 산소호흡기”라고 말했다. 불완전하나마 도서정가제 덕분에 다양한 출판사, 작가, 동네 책방 등 책을 둘러싼 생태계가 목숨을 부지해왔다. 그마저 사라지면 대자본이 이 생태계를 점령할 것이다. 우리 삶의 의미와 가치가 신나게 바겐세일 될 것이다. ‘달리는 김마담’은 며칠 후 도서정가제 사수를 내걸고 청와대 앞 1인시위에 나설 예정이다. 부디 건투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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