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내내 공들여 준비한 일정이 와장창 무너졌다. 3월부터 9월 말까지 반년 동안 유라시아 10개국의 트레일을 체험하기 위해 모든 조율을 마치고 가방을 싸고 있었는데 모든 하늘길이 닫히고 만 것이다. 발이 묶이니 우울증과 갑갑증이 찾아왔다. 원망스러운 마음에 한동안 집콕을 하다가, 문득 의문이 들었다. 난 정말 제주를 다 아는 걸까?
그가 내게 물었다. “서명숙 편집장은 좌파예요? 우파예요?” 뜻밖의 질문이요, 예상 밖의 기습이었다. 2003년 4월 영향력이 큰 보수 매체에서 사장을 지낸 인물이 내가 몸담은 매체(당시 <시사저널>)의 신임 사장으로 부임한 직후 첫 단독 면담 자리에서였다. 잠시 침묵 끝에 “아, 저는 좌도 아니고 우도 아닌데요. 굳이 말하자면 실사구시파, 좌충우돌파라고나 할까요?”라고 답했다. 그는 굳은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신년에 ○○신문에서 하는 이념 척도 여론조사 아시죠? 그 기준으로 한번 대답해보세요.” 불쾌감과 모욕감으로 몸이 덜덜 떨려왔다.
면담을 끝내고 편집국으로 내려오는 계단에 주저앉아 상기된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스무해 넘게 기자 생활을 하면서 ‘산전수전 공중전 백병전’을 다 치렀다고 자부하던 터였지만, 그보다 더한 일을 겪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득한 피로감이 덮쳐왔다. 사표를 쓰고 싶다는 충동도 일었지만, 언론에 대한 질긴 미련과 생계에 대한 공포가 나를 붙들었다.
사표 대신에 휴가원을 내고 고향 제주로 내려갔다. 비양도의 비양봉에 올랐다. 정상에 있는 하얀 등대에 기대어 사방으로 펼쳐진 바다를 내려다보는데, 두 뺨을 타고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이런 바다를, 이런 하늘을 본 게 대체 얼마 만인가. 내 안에서 한 소녀가 울고 있었다. 다시는 널 팽개치지 않으마, 그 소녀에게 약속했다.
돌아오자마자 회사 상사의 이메일로 사의를 표명했다. 그로부터 3년 뒤에 나는 완전히 언론계를 떠났고, 스페인 산티아고 길 800㎞를 혼자 걸었다. 그리고 그 길에서 고향으로 돌아가서 속도전에 지친 사람들을 위로하고 고향 제주의 속살을 보여주는 걷는 길을 내겠노라고 결심했다. 새정치국민회의 총재였던 디제이(DJ)가 출입기자들에게 자주 했던 이야기가 있다. “인생을 살다 보니 행운의 여신은 아름답고 멋진 모습으로 다가오는 게 아니라 대부분은 아주 끔찍한 모습으로 다가오더라고요. 똑바로 마주 보기도 두렵고 힘들 만큼. 어찌어찌 극복한 뒤에 나중에사 돌이켜보면 아, 그게 행운의 여신이었구나 비로소 깨닫게 되는 거죠.” 언론을 향한 미련과 집착을 일거에 끊어내게 만든 그날의 면담이 내게는 ‘행운의 여신’인지 모른다는 생각은 세월이 흐를수록 더 또렷해졌다.
올봄, 또다시 끔찍한 얼굴로 다가온 존재와 맞닥뜨렸다. 한 개인이 아닌 이 나라 온 국민에게, 온 세계 사람들에게 피할 수 없는 재앙으로 닥쳐온 코로나19. 인류가 지구의 자원과 동식물을 마구잡이로 착취하고 학대한 대가를 복리 이자를 붙여서 되갚음당한다고 여겨질 만큼 혹독한 반격이었다.
그 반격으로 지난해 내내 공들여 준비한 일정이 와장창 무너졌다. 3월부터 9월 말까지 반년 동안 유라시아 10개국의 트레일을 체험하기 위해 모든 조율을 마치고 가방을 싸고 있었는데 모든 하늘길이 닫히고 만 것이다. 발이 묶이니 우울증과 갑갑증이 찾아왔다. 원망스러운 마음에 한동안 집콕을 하다가, 문득 의문이 들었다. 난 정말 제주를 다 아는 걸까?
평소엔 엄두도 내지 않았던 한라산 둘레길부터 걷기 시작했다. 천아숲길, 돌오름길, 수악길, 동백길…. 둘레길 여러 구간을 여러차례 걸어서 다 완주한 뒤에는 마을에서 낸 숲길을 걸었다. 머체왓 숲길, 추억의 숲길, 호근동 마을숲길, 길은 정말 끝이 없었고 풍경의 다양함은 상상을 초월했다. 어떤 날에는 사람보다 노루를 더 많이 만나기도 했다. 숲길 다음에는 한라산 정상 루트를 올랐다. 그렇게 반년을 보내면서 나는 제주를 절반도 모르면서 다 안다고 생각했던 나 자신에 대해서 반성했고, 끔찍한 얼굴의 코로나19 때문에 발이 묶이는 바람에 제주의 또다른 얼굴을 보게 된 데 대해 감사를 드렸다.
더 큰 행운은 따로 있었다. 제주올레 걷기 축제를 내 오랜 로망대로 치르게 된 것이다. 올해로 11회를 맞는 축제를 앞두고 올봄부터 올레 사무국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면서, 회의를 여러차례 열었다. 그러는 사이에 코로나 단계는 2.5단계로까지 격상되었으니 사무국의 고민은 더욱 깊어졌다. 해마다 참가 인원이 늘어서 연인원 1만여명이 참가하는 사흘간 축제를 어떻게 치를 것인가.
치열한 토론 끝에 도출해낸 결론은 세가지였다. 이삼천명이 모여서 사흘간 3개 코스에서 즐기던 축제를, 23개 코스에서 23일간 분산형으로 연다(우도, 가파도, 추자도 등 섬코스 3개는 제외했다). 한 코스당 참가자는 15명, 올레코스 완주자들에게 참가 우선권을 준다. 논의 과정에 일부러 참여하지 않았던 나는 그 결론을 듣고서 놀라서 까무러칠 뻔했다.
올레길이 시작되고 2년 후부터 축제를 열기 시작하면서 나는 호언장담했다. 제주를 한 바퀴로 잇는 길을 완성하고 나면 모든 해안가 마을에서 동시에 한달 동안 축제가 열리게 하겠노라고. 그러나 첫해 5일간의 축제를 치른 뒤에 업무 강도에 치인 사무국의 건의로 축제는 사흘간으로 축소되었고 나의 로망 한달 축제는 ‘백년 뒤의 꿈’으로 미뤄지고 말았다. 한데, 코로나19 시대를 맞아 그 어느 때보다도 더 간절하게 위로의 길, 힐링의 길을 걷기를 바라는 올레꾼들의 바람은 거셌고, 방역수칙도 지키면서 축제도 성사시키려는 사무국의 고민은 백년 뒤의 꿈을 당장 현실로 당겨놓기에 이른 것이다(올해 제주올레 걷기 축제는 10월23일부터 11월14일까지 23개 코스에 걸쳐서 펼쳐질 예정이다).
평온한 일상이 계속되었다면 하지 않았을 고민, 놓쳐버렸을 질문들을 통해 우리는 본질적인 것에 다가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끔찍한 얼굴의 여신’과 직면하는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해법을 찾아가는 과정, 그 길에서 우리는 진화하는 ‘행운’을 만나는 것이 아닐까.
서명숙 ㅣ 제주올레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