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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김여사의 어쩌다 마을] 배달노동자 수철 덕분에

등록 2020-11-01 17:17수정 2020-11-02 02:39

이십대 청년이 ‘김여사의 어쩌다 마을’을 먼저 읽고 그리다. 김우석
이십대 청년이 ‘김여사의 어쩌다 마을’을 먼저 읽고 그리다. 김우석

수철은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영화감독이었다. 예술가가 대개 그렇듯 세상 물정에 어둡고 생활감각도 무뎠지만 영혼이 따뜻했다. 프리랜서라 소속도 없고, 수입도 일정하지 않았다. 바쁠 땐 며칠씩 밤새워 일하고, 일거리가 끊기면 낚시와 당구를 즐겼다. 한량 같기도 했다.

수철의 삶이 바뀌기 시작한 건 아내 수진이 아프면서부터였다. 불규칙한 수철의 벌이에도 네 식구 살림살이가 그리 궁색하지 않았던 건 수진이 열심히 일한 덕분이었다. 수진은 직장생활에다 두 아이 양육과 살림까지 묵묵히 해냈다. 남편의 작품을 진심으로 아끼고 좋아했다. 수철이 예술가로 오래 버텨온 이유다.

고운 미소에 선한 마음씨의 수진은 마음이 아프면서 눈빛과 말투가 공격적으로 변했다. 직장을 그만두고 자꾸 사업을 벌이고 빚도 진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남편과의 말다툼도 잦아졌고, 집을 나가 연락 두절도 여러 차례라고 했다. 그렇게 “모든 것을 태워버릴 듯한 사막의 태양 같은” 몇달이 지나고 나면, “극단적 추위의 밤 같은” 시간이 수진을 찾아왔다. 대책 없던 수진은 가고 한없이 가여운 수진이 나타났다.

이 가족을 덮친 불행에 이웃들은 아파했다. 병의 성격상 치료가 어렵다니 수철이 감당해야 하는 ‘끝이 안 보이는 터널’ 같은 상황이 기가 막혔다. ‘수진의 병은 수철이 가장으로서 무책임했기 때문’이라며 수진을 동정하는 분위기도 있었다. 그게 또 수철에게 상처가 되기도 했다. 아무렴 수철을 비난한 건 아니었다. 그저 수진이 너무 안타까웠던 것일 뿐.

벼랑에 몰린 수철이 선택한 일이 배달노동이었다. 로켓같이 빠른 배송을 자랑한다는 회사의 배송맨이 됐다. 고용 상황도 안 좋은데 마흔을 훌쩍 넘긴 수철이 갈 곳은 없었다. 병든 아내를 건사하고 어린 자식들을 키우려면 뭐라도 해야 했다. 출근 전날, 수철의 새 출발을 응원하며 이웃 몇몇이 조촐한 파티를 열었다. “수십군데 원서를 넣었는데 면접 보라는 연락도 거의 없었어요. 그래도 여기는 2년만 버티면 정규직이 될 수 있으니 열심히 해야죠.”

취직한 지 한달 만에 수철은 앙상해져서 나타났다. 10킬로그램 넘게 빠졌다고 했다. 다들 걱정했지만 그는 외려 씩씩했다. “땀 흘리는 건강한 노동자로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 잡 레벨이 오르고 있다며 자랑하기도 했다. 그럼 뭐가 좋으냐고 물으니 대답한다. “월급도 오르고 정규직이 될 가능성도 크죠. 캠프의 리더가 될 수도 있고요.” 일이 몸에 붙으니 밑바닥에서 한 계단씩 올라가는 재미도 쏠쏠하다고 했다. “2년 잘 버티고 정규직이 돼서 배달 그만하고 사무직으로 전환되면 좋겠어요.” 내가 말했다. “배달이 마음이 편해요.” 그가 씩 웃었다. 잡 레벨이 올라갈수록 그의 몸무게는 점점 내려갔다. 극심한 경쟁에서 오는 압박감, 자신보다 어린 상사에게서 받는 모멸감 같은 스트레스를 몸은 속이지 못했다.

지난봄 이후 수철은 더욱 힘들어졌다. 코로나19로 택배 물량이 폭주한 탓이다. 5월에는 회사 물류센터에서 집단감염 사건이 터졌다. “이전엔 안 그랬는데 엘리베이터 안에서 주민들의 불편한 시선이 느껴지네요.”

힘든 2년을 견뎌온 그는 며칠만 지나면 정규직의 관문을 통과한다. 계약직으로 2년 일하면 대부분 정규직 전환이 되는 것으로 유명한 회사지만, 막상 그 2년을 견디는 사람은 거의 없다. 몸이 허락하지 않는 탓이다. 그 시간을 버틴 그가 대견하고 고마운 마음에 “이제 정규직이 되니까 승진도 하고 몸도 좀 편해지지 않을까요?”라고 물었다. “얼마 전 그룹 리더가 돼서 팀원 50명을 관리하고 있는데, 오히려 고민이 많아지네요. 배달은 배달대로 하면서 관리도 해야 돼요. 몸도 힘들지만 마음이 지쳐요.” 자신보다 임금도 고용도 취약한 노동자들을 관리라는 명목으로 경쟁시키는 데서 오는 부담일 것이다. 배달만 할 때는 그나마 퇴근 시간이라도 일정했는데, 요즘은 밤 10시를 훌쩍 넘기는 일도 잦단다.

이제 우리 동네 이웃들은 엘리베이터를 같이 탄 택배노동자를 보면 수철 생각이 난다고들 한다. 층마다 엘리베이터가 서면 짜증이 나다가도 수철을 떠올리게 됐다. 좀 느려도 택배노동자의 건강과 안전이 먼저라고 생각하게 됐다. 조금 더 편하자고, 기업들 이윤 올리자고 노동자를 죽음으로 내몰지 않는 세상이 오면 좋겠다.

얼마 전 수철은 신축 임대아파트로 이사를 갔다. 그가 다시 예술가로 복귀해도 좋겠지만, 배달노동자 수철도 희망차면 좋겠다. 어느 쪽이든 적절히 일하고 대가를 얻는 세상이 되면 좋겠다. 새 보금자리에서 아내 수진이 남긴 보석 같은 두 아이와 행복하게 살 수 있다면 참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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