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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김여사의 어쩌다 마을] 타인의 불행이 내 행운이 되는 세상에서

등록 2020-12-13 17:10수정 2020-12-14 02:39

스무살 청년이 ‘김여사의 어쩌다 마을’을 먼저 읽고 그리다. 장태희
스무살 청년이 ‘김여사의 어쩌다 마을’을 먼저 읽고 그리다. 장태희

드라마 작가인 릴라 언니는 요즘 매일 아침 해외여행을 떠난다. 비행기는 못 타지만 각 나라의 감성이 담긴 커피잔으로 한껏 기분을 낸다. “오늘은 폴란드 잔으로 마셔볼까? 어제는 독일 여행을 했고. 내일은 일본으로 가봐야지” 하는 식이다. 지난여름부터 사 모은 찻잔이 제법 구색을 갖춰가면서 골라 마시는 즐거움이 쏠쏠하단다. 평소 검약하던 그녀가 나름 호사스러운 취미를 누리게 된 비결은 지역 기반의 중고거래 앱에 있다. 제 돈 주고 사려면 한 세트에 10만원은 훌쩍 넘는 고가의 커피잔도 중고로는 절반 아래 가격에 구할 수 있단다. 덕분에 코로나 블루에 갱년기 무력감까지 겹쳐 힘든 시간을 보내던 언니가 조금씩 활기를 되찾아간다.

언니는 찻잔에서 시작해서 가방, 옷 등으로 품목을 넓혀갔다. “좋은 물건을 싼값에 사는 것도 좋지만, 자원을 재활용한다고 생각하니 마음의 부담도 없어요.” 지역에서의 거래라 운송에 따른 이산화탄소 배출도 대폭 줄어든다. 환경도 고려한 윤리적 소비가 되는 느낌이다.

공장에서 갓 나온 새 물건과 달리 중고 물건에는 그 나름의 고유한 역사도 담겨 있다. “꽃무늬로 유명한 영국 황실 찻잔을 사려고 만난 분은 초로의 여성이었어요, 그분이 40년 전 영국에 이민 가서 식당을 열었는데 힘들던 시절 큰맘 먹고 샀다는 잔을 이번에 사들였어요.” 사람의 역사, 땀 냄새, 지역생활의 즐거움까지 덤으로 따라오는 게 중고거래의 매력 같다. “이참에 중고거래를 통해 만난 다양한 사람, 물건에 담긴 역사를 소재로 드라마를 써보면 어떨까요.” 내 제안에 언니의 귀가 쫑긋해진 것만 같았다.

앱을 통한 중고거래가 원만하게 성사되려면 지켜야 하는 나름의 룰들이 있다고도 한다. 너무 절박해 보이지 않아야 한다는 것도 그중 하나. 50대 중년 남성 노아는 최근 앱으로 인생 버킷리스트 중 하나인 디지털 피아노를 장만해서 들떠 있다. 포장도 안 뜯은 신상 피아노를 인터넷 최저가보다 한참 싼 가격에 샀다니 그 비결을 물었다. “판매자가 피아노 선물을 받았는데 원하는 게 아니라서 내놓았대요. 그런데 막상 연락해보니 악기 매장이더군요. 얼마 전 오픈했는데 손님이 너무 없어서 부득이하게 중고가로 내놨다네요.” 조금은 이상해서 물었다. “차라리 가게가 어려워서 싸게 판다고 솔직히 말하지 왜 거짓말을 했을까요?” “힘들어서 싸게 내놓는다고 솔직하게 말하면 오히려 연락이 잘 안 온대요. 당장은 공감하고 안쓰러워하지만, 막상 거래는 잘 안된다고요. 가격 흥정이 어렵다고 생각한다나 봐요.” 노아의 대답이었다. 아쉬운 사람끼리 만나서 안 아쉬운 것처럼 보여야 거래 성사가 쉽다는 중고거래의 역설이다. 지역 기반이라고는 해도 서로 안면 없는 사람들이다. 결국은 조건부터 따지게 되니 생기는 일일 것이다.

중고거래에 물건의 역사가 담겨 있다는 것도 늘 즐거운 일은 아니다. 얼마 전 내 경우가 그랬다. 책상이 필요해서 찾던 중에 개당 5천원이라는 희소식을 접하고 서둘러 달려갔다. 100평이 넘는 대형 공간에는 책상, 의자, 조명 등 온갖 집기들이 처분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이들에게 인기가 높다는 슬라임카페를 운영했는데 코로나로 유지가 어려워져서 ‘눈물의 땡처리’ 중이라고 했다. “개업한 지 1년 반 정도 됐어요. 아이들이 많은 신도시라 1~2년 하면 자리를 잡겠지, 기대하고 대출받아 시작했는데 도저히 버틸 수가 없네요.” 젊은 여사장님의 한숨이 깊었다. 인건비는커녕 월 200만원 넘는 임대료도 감당할 수가 없어 폐업을 결정했단다. “며칠만 더 일찍 오셨어도 좋은 물건들 많이 챙기셨을 텐데” 하며 남은 물건들을 거의 공짜로 주었다. 중고거래에서는 곧잘 타인의 불행이 내 행운이 되곤 한다. 그게 즐거울 리 없다.

중고거래 앱만큼 품목이 많은 건 아니지만 사실 우리에게는 우리만의 중고장터가 있다. 바로 마을의 바자회다. 바자회가 열리면 티 1천원, 청바지 2천원, 따뜻한 겨울 패딩도 2만원이면 거의 새것으로 장만할 수 있다. 사놓고 안 쓰던 물건, 몇 번 사용했지만 처분하기는 아까운 물건들이 기꺼이 바자회에 나온다. 작년에는 동네 이주노동자의 초등학생 딸이 백혈병 진단을 받았다는 소식에 바자회 수익금을 전액 기부하기도 했다.

규모는 작지만 꾸준히 열리다 보니 바자회를 기다리는 이웃들이 제법 많다. 당장 급하지 않은 물건은 바자회 때까지 기다려 장만하고 꼭 필요한 물건은 예약을 걸어두면 누군가 내놓곤 한다. 여기서는 타인의 불행이 내 기쁨이 되는 역설이 없다. 코로나로 이마저 어려워졌다. 이 겨울을 견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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