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오피니언 칼럼

[김여사의 어쩌다 마을] 이 마을까지 덮친 부동산 광풍

등록 2021-01-03 16:13수정 2021-01-04 02:07

스무살 청년이 ‘김여사의 어쩌다 마을’을 먼저 읽고 그리다. 장태희
스무살 청년이 ‘김여사의 어쩌다 마을’을 먼저 읽고 그리다. 장태희

“요즘은 ‘벼락거지’가 된 기분이야. 내 처지에 할 말은 아니지만.” 오랜만에 전화 수다를 떨던 중 선배 언니가 한탄했다. 강남이나 다름없는 신도시에 살면서 상속받은 집도 있는 처지니 스스로도 벼락거지라는 표현이 민망했나 보다. 그래도 박탈감은 어쩔 수 없단다. 십여년 전 신도시 단독주택으로 이사하면서 강남 아파트를 팔았던 것. 부동산 광풍에 지금 집도 올랐지만 팔아버린 옛 아파트 값은 상상 초월, 하늘을 찌른단다. 소문난 ‘워커홀릭’인 그녀는 “미친 듯이 일해서 번 돈을 우습게 만드는 집값 폭등에 허망해진다”며 푸념했다. 제법 잘사는 중산층의 박탈감이 이 정도라면, 집 한 채 없는 서민의 박탈감은 도대체 어느 정도일까?

동네 절친 릴라 언니가 요즘 그렇다. 종종 밤잠도 설친다. 언니는 2년 전쯤 오래 살던 아파트를 팔고 신축 아파트에 전세로 들어갔다. 살던 아파트는 가격이 오르기는커녕 거래마저 끊긴 낡은 아파트였다. 남편은 강하게 반대했다. 아무리 허름해도 은퇴 준비할 나이에 유일한 재산인 집을 파는 건 아니라는 이유였다. 부부 사이에 한동안 냉랭한 기운이 감돌기도 했단다. 그래도 새집으로 이사 가서 참 좋아했다. 지난가을 분위기가 심상치 않더니 아파트 가격이 몇억원씩 올랐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언니네가 판 ‘애물단지’ 낡은 아파트조차 1억원 이상 올랐다고 한다. “졸지에 집 잃은 벼락거지가 된 느낌이에요. 남편 얼굴 볼 염치가 없어요.”

그 상실감에 공감하며 7년 전을 떠올린다. 재계약 때마다 치솟는 전세금을 그때그때 대출로 감당하면서 탈진해가고 있었다. 서울을 떠나 여기 수도권 외곽에 내 집을 장만해서 이사 온 이유다. 서울에 비하면 집값이 무척 쌌고, 그 후로도 줄곧 쌌다. 그때 선택지에 놓고 고민했던 서울의 아파트는 이후 폭등해서 이제는 바라볼 수도 없는 가격이 됐다. 부동산 투자라는 관점에서는 완전한 실패다. 대신 내게는 안정감이 생겼다. 부동산으로 돈 벌 생각 따위가 사라지니 욕망의 레이스에서 탈출한 기분이었다. 집값은 삶의 안정감에 지불하는 비용이었다. 그 안정감 위에서 이웃이 생겼다.

6년 전쯤, 이 동네에서 처음 가본 이웃집 ‘현테라스’도 그랬다. 귀여운 딸 이름을 따서 이렇게 부르는 집은 단독주택 1층을 사람들이 쉽게 드나들 수 있게 카페처럼 꾸몄다. 우리 부부 같은 낯선 신참도 부담 없이 들어갈 수 있는 구조다. 그날, 한 집이 김장했다며 가져온 보쌈김치를 안주 삼아 막걸리를 나눴다. 화목난로에 고구마도 구워 곁들였는데 마침 창밖으로 함박눈이 내렸다. 서울에서는 꿈도 못 꿀 광경이었다. 현이네는 부자가 아니다. 아직도 엄청난 대출금을 갚고 있다. 현이네는 참된 부자다. 저토록 비경제적인 공간을 만들어서 사람 냄새로 채울 정도로 마음이 여유롭다. 욕망의 경주에서 벗어났으니 가능한 일이다.

이 마을에는 이런 비상식적인 일이 적잖다. 집을 지으려는 사람들은 저마다 어떻게든 커뮤니티 공간을 만들고 싶어 한다. 어떤 이는 마당에 컨테이너 카페를 만들어서 아지트로 제공하고, 어떤 이는 방 하나를 중년 남자들을 위한 당구장으로 만든다. 성공회 신부님은 3층짜리 건물을 지으면서 1층을 아예 마을 커뮤니티 공간으로 제공했다. 월세를 포기한 것이다. 그 공간에서 매일 탁구 치고 주말마다 노래하고 계절마다 바자회를 열었다. 어른과 아이들이 한데 어울리며 성장했다. 집이 재산을 불리는 수단인 곳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단독주택을 제집으로 가져야만 이렇게 살 수 있는 건 아니다. 아파트인 우리 집은 거실에 스크린을 설치하면서 마을 시네마가 되었다. 함께 영화 보고 영화를 핑계 삼아 인생 수다 나누는 기쁨이 쏠쏠했다. 김장이나 신년 떡국 행사를 늘 주관하는 애라네는 연립에 산다. 남편 사업이 실패한 후 7년 넘는 월세살이지만 ‘애라살롱’은 여인들 최고의 아지트다.

이 모두가 집값이 안정적이라 가능했다. 전세도 월세도 안정적이었다. 시쳇말로 망한 신도시여서 가능했다. 우리 마을 사람들이 특별히 선하기야 할까? 여기서는 욕망의 잔재주를 부려봐야 헛수고였던 탓이다. 안정된 집값 덕에 한동네에 오래 살 수 있었고, 그 참에 어울려 사는 맛도 알 수 있었다.

얼마 전부터 이 외진 곳까지 부동산 광풍이 몰아치고 있다. 세상에, 우리 집마저 올랐다. 사려 깊은 이웃들이라 티 안 내려 조심하지만 집 가진 이와 없는 이들 사이에 기대감과 열패감이 교차하고 있다. 우리는 이 상처를 어떻게든 보듬고 갈 테지만, 그래도 상흔은 남을 것 같다. 정치가, 세상이 참 원망스러운 시절이다.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오피니언 많이 보는 기사

윤석열이 연 파시즘의 문, 어떻게 할 것인가? [신진욱의 시선] 1.

윤석열이 연 파시즘의 문, 어떻게 할 것인가? [신진욱의 시선]

“공부 많이 헌 것들이 도둑놈 되드라” [이광이 잡념잡상] 2.

“공부 많이 헌 것들이 도둑놈 되드라” [이광이 잡념잡상]

‘단전·단수 쪽지’는 이상민이 봤는데, 소방청장은 어떻게 알았나? 3.

‘단전·단수 쪽지’는 이상민이 봤는데, 소방청장은 어떻게 알았나?

극우 포퓰리즘이 몰려온다 [홍성수 칼럼] 4.

극우 포퓰리즘이 몰려온다 [홍성수 칼럼]

‘영혼의 눈’이 썩으면 뇌도 썩는다 5.

‘영혼의 눈’이 썩으면 뇌도 썩는다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