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살 청년이 ‘이충걸의 세시반’을 먼저 읽고 그리다. 김예원
이충걸 | 에세이스트
한 친구는, 결혼한 뒤로 끈질기게 이사를 했다. 연대기로 나열해도 A3 용지 하나는 다 채울 만큼. 그는 십오년 동안 거의 무의식적으로 짐을 쌌고, 또 다른 터를 찾아 충동적으로 움직였다. 그의 이사에는 늘 시세 차익이라는 종교가 날름거리고 있었다. 어쩌다 한번 그의 집에 들렀다가 이쑤시개에 앉은 듯 불편해 죽을 뻔했다. 기초생활 일습만 일시적으로 집어넣은 야영지 텐트 같아서. 당장 내일이라도 이사 갈 수 있게 세간살이를 극단적으로 줄인 집이라면 극빈자라도 을씨년스러워할 것이다. 그러니 ‘매일 버리는 연습 하기’ 교의 교주라도 그 친구에게 꿀리지 않을 재간이 없을 것이다.
그 친구에게 이사란 하나의 탐색이었다. 그 자신도 투자라고는 결코 말하지 않았다. 어떤 열등감을 계기로 탐색 충동이 커졌는데, 악화된 증세의 결과는 농구장만 하게 큰 집과 여타의 집 소유로 돌아왔다. 전에는 부모한테 뭘로 벌어먹고 살 거냐, 빌어먹을 놈아, 맨날 드잡이당하던 사람이 이젠 집안 누구도 무시 못 할 기세등등 거물이 되었다. 맨날 책이나 끼고 다니면서 유식한 척 배운 변태 짓이나 하는 나는, 책 한권 읽은 것 없이 유달리 돈의 행방에 밝아 부동산 호시절을 만끽하는 친구에겐 한주먹 거리도 안 됐다. (수년 전, 그간 살던 집을 팔게 되어 부동산 아저씨와 몇몇 절차를 밟는데 내가 관련 용어며 과정을 하나도 알아듣지 못하니까, 급기야 그분이 이렇게 말했다. “한국에 오신 지 얼마 안 돼서 말이 좀 어려울 거예요.”)
그 자수성가형 동네 재벌이 새로 산 집으로 초대했을 때 나는 왜 거절하지 못했을까. 솔직히 머리가 너무 아팠다. 왜? 한강이 보인다고 자랑하려고? 그래 놓고 또 이사 갈 거잖아? 내가 가서 “우와!” 해줄 줄 알고? 그렇지만 사실 묻고 싶은 게 있었다.
집은 누구를 위한 안식처야? 집에서 너를 기다리는 건 뭐야? 요즘 집의 구조는 온통 전자기장 결계가 쳐져 집에 들어가기도 무서울 텐데? 휴대폰 안에 조성된 전자 마을 아파트 공동체가 꽹과리 치며 반긴대? 그러자 그가 말했다. “물론 가족의 사랑이 나를 기다리지.” 아니, 이자가 요새 가족 본위 드라마에 빠졌나? 그러나 그 친구와 나, 둘 중 누가 시대착오인지는 답이 뻔했다. 바로 나.
이제 집은 위치, 장소와 상관없이 유령처럼 유동적인 쇼핑 목록이 되었다. 미치지 않고선 지리학적으로 정의된 집의 개념에 동의할 수 없다. 마음의 안식처? 화장실 딸린 직육면체? 잠깐 쉬자마자 떠나기 바쁜 정박지? 조건에 따른 화폐의 신념? 온갖 형태로 엮인 재정적 압박?…. 어딘가에 자리 잡고 나면 방위(方位)의 의미가 달라지는 세상에 지역이라는 개념이 불변일 수 있을까?
집은 지도의 어느 곳에나 있다. 집의 위치를 지도에 표시하는 것은 수정과 개정의 끝없는 연속이기 때문에. 결국 부재하는 집의 뿌리는 물리적이기보다 서정적인 문제와 관련된다. 그 친구에게 집이라고 부를 만한 공간이 없어 뵈는 이유는 그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시세 차익의 화신이 이런 소리를 들으면 쥐뿔도 없으면서 무슨 고양이 걱정이야? 이럴걸.
그 와중에 걱정이 하나 늘었다. 그 부부가 음식을 준비한다고 했기 때문에. 한강 뷰라는 게 그렇게까지 대단한 건지 후딱 둘러보고 올 요량이었는데 일이 커졌다. 차라리 머리가 아팠다. 즐거운 곳에서는 날 오라 하여도 내 진정 쉴 곳은 집 내 집뿐이었던 마음에 한방 먹여 놓고 뭘 더 먹으라는 거야? 먹고 체하라고? 차라리 역류성 식도염이라 잘 걷지 못한다고 거짓말할까? 여행 갔을 때 우리 몸과 마음이 어디 있는지, 집이라는 곳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왔는지 음식만큼 설명하는 것도 없다. 집에 있으면 아무것도 안 먹어서 작년에 먹은 새우깡이 말똥구리처럼 방바닥을 굴러다니는 집의 아이도 집만 떠나면 그릇까지 씹어 먹던걸. 숙소에서 안 해먹고 굳이 근처 편의점을 털어 밤새 먹고 마시곤 다음날, 풍뎅이처럼 부은 얼굴을 서로 확인하던 우리 기쁜 젊은 날.
그날 저녁 친구는 중국음식을 배달시켰다. 역시… 예상과 한치 한푼이 다르지 않다는 게 기쁜 건지 언짢은 건지 나도 헷갈렸다. 그는, 음식이란 인간의 생리적 필수품에 불과하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재차 못 박았다. “음식은 단순히 차의 기름 같은 거야.” 음식의 의미는 원시적인 것. 음식에 대한 갈망은 살기 위한 영양소 섭취. 그러곤 종지부를 찍었다. “집에서 음식 만드는 것만큼 귀찮은 게 없어.”
그 친구에게 음식은 사랑처럼 모두가 숭상하는 근원적 욕구보다 열등한 가치였다. 그렇다면 그를 묶어주는 사랑도 식탁이 있는 집 말고 현란한 섹슈얼과 긴장으로 가득한 집 밖 어딘가에 나뒹굴고 있으려나? 밖에서만 끼니를 해결하던 텅 빈 냉장고의 고시생처럼? 그날 나는 싸구려 고량주에 덧없이 취해선 저작근을 꽉 물었다. 그리고 자꾸만 나에게 주의를 주었다. 앞으로 어디서 살든 주방을 사랑하기 전까진 그 집을 ‘우리 집’이라고 부르지 말아야지, 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