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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김여사의 어쩌다 마을] 어느 고양이가 남긴 선물

등록 2021-03-28 16:19수정 2021-03-29 02:09

스무살 청년이 ‘김여사의 어쩌다 마을’을 먼저 읽고 그리다. 장태희
스무살 청년이 ‘김여사의 어쩌다 마을’을 먼저 읽고 그리다. 장태희

며칠 전 부고 한통이 날아왔다. 수철씨네 고양이 야후가 죽었다는 메시지였다. 야후는 세살 된 벵골고양이로 화려한 얼룩무늬에 에너지 넘치고 활달한 고양이였다. 얼마 전까지도 특유의 활력으로 강렬한 존재감을 과시했다. 그런데 갑자기 고양이 별나라로 떠났다니, 놀라고 슬픈 마음에 눈시울이 붉어졌다.

야후가 수철씨 집에 입양 온 건 2년쯤 전이었다. 그때 수철씨 집은 불행이 엎치고 덮쳤다. 마음이 많이 아프던 아내가 집을 떠났고 사춘기에 접어든 큰딸 연이는 상처 입은 짐승마냥 자기 동굴 속에 웅크리고 있었다. 프리랜서 애니메이션 감독이던 수철씨는 생활을 위해 배달노동자로 나섰고, 야위어갔다.

안타까움에 전전긍긍하던 중 수철씨가 내게 연이의 대모가 되어달라고 요청했다. 종교도 없고, 대모가 되기엔 인품도 모자랐지만, 기꺼이 응했다. 결연식도 했다. 연이는 내내 조용했다. 사실 나도 뭘 해야 할지 몰랐다. 열세살 사춘기 소녀와 나이 오십 중년 여성 사이에 접점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예민한 시기에 불행이 덮쳐 힘겨운 소녀에게 섣부른 동정은 오히려 상처가 될 것 같았다. 고심 끝에 생각해낸 일은 가끔 연이가 좋아하는 마카롱이나 피자 등을 사들고 현관 앞에 두고 오는 정도였다. 문자를 보내면 연이는 한참 후에 짧은 답신을 보내왔다. 억지로 문을 열기보다는 문밖에서 응원했다.

그 문이 열리고 서먹하던 연이와 나 사이에 변화가 생긴 건 벵골고양이 야후가 등장하면서부터였다. 고양이가 ‘환장하는’ 참치와 츄르를 들고 가면 연이는 활짝 웃으며 문을 열었다. 야후, 야후와 함께 들어온 페르시안고양이 네이버를 보면서 이야기하다 보면 두어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네이버는 고급스러운 페르시안고양이답게 새초롬하고 예쁜 대신 까칠했다. 조금만 다가가도 앞발톱을 세우면서 ‘하악질’을 했다. 반면 야후는 간식도 잘 받아먹고, 처음 본 사람에게도 붙임성 있게 다가와 부비곤 했다. 용수철처럼 여기저기 튀어오르는 야후와 함께 침울하던 집안에도 생기가 돌았다. 몇달 뒤 수철씨가 아기 고양이 토토를 길에서 데려왔을 때도 야후는 ‘형아’처럼 따뜻이 보살폈다.

얼마 전 대형 사고가 났다. 막내 토토가 야후의 새끼를 네마리나 낳은 것이다. 세마리 모두 수컷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토토가 암컷이었던 것. 수철씨는 “야후와 토토가 유난히 친해서 브로맨스인 줄 알았는데 남녀상열지사였어요. 뒤통수를 맞았어요”라며 껄껄 웃었다. “나는 매일 밤 외롭게 독수공방하는데, 내 침대에서 이것들이 사랑을 나누었단 말이죠.”

네마리 아기 고양이 모두 외모부터 성정까지 아빠 야후를 쏙 빼닮았다. 손바닥만한 아기 냥이들이 온 집안을 헤집고 다녔다. 새로 구입한 소파는 이제 일곱마리 고양이들이 긁어댄 자국으로 온통 너덜너덜해졌고, 집안은 난장판이 됐다. 그래도, 아니 그래서 이 ‘동물의 왕국’에는 어떤 찬란함이 있었다. 마냥 아기 같던 토토는 어느덧 엄마가 되어 새끼 넷을 젖 먹이고 있었다. 그 모습이 귀엽다기보다 숭고했다. 아빠 고양이 야후는 그 옆에서 가족을 살폈다. 기특하게 간식도 새끼들에게 양보하곤 했다. 새끼들이 자고 있으면 옆에서 지켰다. 이 찬란한 동물의 왕국에서 연이의 얼굴은 어느새 환해졌고 어른들과 대화도 늘었다. 부쩍 성숙해졌다. 일찍 나가 늦게 퇴근하는 아빠를 대신해 고양이 밥 챙기고 똥 치우는 일에도 제법 익숙해졌다.

그리고 보름 전. “야후가 하루 종일 자길래 살펴보니 밥도 안 먹고 아픈 것 같았어요. 병원에 가보니 심장 쪽에 흉수가 있고 염증 수치도 정상보다 네배나 높다는 거예요. 열도 40도가 넘고, 몸무게도 1킬로 이상 줄었어요.” 병원에서도 병명을 알아내지 못해 일주일치 약만 받아왔는데, 식음을 전폐하고 앓다가 일주일 만에 고양이별로 떠났단다.

생명 있는 것들은 누구나 살고 싶어 한다. 하지만 죽음 또한 삶의 법칙이다. 누구보다 건강하고 활달하던 고양이 야후가 죽었다는 소식에 왠지 모를 허망함이 밀려왔다. 야후는 특유의 에너지와 건강함으로 생기와 위로를 준 고마운 고양이다. 인간으로 따지면 내가 닮고 싶어 하는 그런 종류의 동물이었다. 야후가 고양이별에서 고통 없이 뛰어놀고 있길!

그날 밤 나는 여러 병을 안고 태어나 버려졌다가 우리 집 식구가 된 고양이 하루를 꼭 안으며 속삭였다. “하루, 옆집 야후 형아가 냥이별로 떠났어. 하루는 아프지 말고 건강하게 오래 살자!”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하루는 ‘냥~’ 하더니 품에서 풀쩍 뛰어 쌩하고 가버렸다. 하루 덕분에 오늘 하루도 조금은 더 잘 살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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