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5·18 민주화운동 40돌을 하루 앞둔 5월17일 광주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서 정자영 작가의 영상 퍼포먼스 <빛>(LIGHT)이 펼쳐지고 있다. 1980년 광주항쟁에서 희생된 시민들의 영정사진 앞에 설치된 독립된 조명들이 ‘빛’을 밝히는 형태로 진행된 이 퍼포먼스는 5·18의 상흔을 위로하며 5·18 정신의 현대적 계승을 의미하는 통로이자 창문이 되기를 희망하는 의미를 담았다. 광주/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편집자주: 한칼 공모를 통해 선발된 독립연구공동체 ‘광주모더니즘’은 격주로 광주의 현실과 개별의 삶을 이야기한다. 어제의 광주와 오늘의 광주, 5·18 세대와 5·18 이후 세대의 소통을 꾀함으로써 지역의 문제를 딛고 한국 사회의 문제를 짚는다. 다음 차례는 또 다른 한칼 선정자인 부산 기반의 젠더·어펙트연구소가 맡는다. ‘한반의반도’는 한반도에서 또 나머지 반(半)으로 구별, 인식되는 ‘지역’으로부터의 발화를 심도 있게 담아보고자 한다.
‘내’가 발 딛고 서 있는 탈진할 것 같은 삶에서 벗어나 다른 삶의 가능성으로 나아갈 수 있는 꿈의 근거를 5·18과 광주에서 찾아낼 수 없다면 5·18은 영원히 저 동어반복의 기념비에 갇힐 뿐이다. ‘나’는 그들이 만든 거대한 기념비 앞에서 묵념만 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경험했고 마주하는 현실에 대해 스스럼없이 이야기하고 싶다.
이주자다, 나는. 13년 전 대학교 진학 때문에 광주에 왔지만, 주소지를 완전히 광주로 옮긴 것은 올해 초의 일이다. 고향 대전에서 어린 시절 물건을 납품하러 가던 아버지를 따라갔을 때 보았던 전남방직의 휘황찬란한 ‘불빛’에 잠시 매혹되었던 때도 있었다. 그로부터 20여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 작은 불빛에라도 의지하며 이곳 광주에 정착하는 일은 나의 삶에 중요한 과제가 되었다. 주소지를 옮긴 것은 각오였다, 여기서 살겠다는.
유학 온 이래 학교는 광주에서 얻은 유일한 보금자리였다. 대학원까지 진학하며 온종일 연구실에 틀어박혀 학교 밖 친구를 만들 기회가 많지 않았다. 그런데 보금자리 같던 학교에도 구조조정이라는 광풍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대학 끝자락에서 아슬아슬하게 생존을 유지할 수 있는 호흡장치가 없는 건 아니지만 크게 기대하긴 어려웠다. 공부와 생존의 기로에서 불안정하게나마 하고 싶은 일을 좇아 학업을 이어가며 지역 영화잡지에 비평문을 쓰는 등 학교 안팎의 활동을 애면글면 늘려가며 광주의 현지인이 되고자 했다. 잠시나마 ‘이주자’가 아닌 ‘현지인’으로 안착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뜻밖에도 광주에서 만들어진 5·18 영화들과 마주하면서 현지인이 아닌 이주자라는 나의 위치를 다시 확인해야 했다.
최초의 5·18 영화라고 알려진 <황무지 5월의 고해>(1988, 김태영)부터 2019년에 개봉한 <김군>(2019, 강상우)에 이르기까지 광주의 외부에서 생산된 5·18 영화들은 독창적인 시선과 연출로 5·18을 조명한다. 5·18의 후유증으로 마음을 놓아버린 광인(<황무지 5월의 고해>), 가족을 잃어버리고 세상을 배회하는 소녀(<꽃잎>, 1996, 장선우), 심지어 공수부대원(<박하사탕>, 2000, 이창동) 등 광주 밖의 5·18 영화들은 다양한 인물들의 시선을 빌려 1980년 그날의 사건과 이후의 삶을 입체적으로 재현한다. 하지만 광주 내부에서 생산된 5·18 영화들을 보았을 때는 이러한 입체감을 느끼지 못했다. 광주의 5·18 영화들 또한 다양한 인물들의 시점으로 5·18을 다루고 있음에도, 하나같이 동일한 주제를 같은 방식으로 재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상했다. 마치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한입으로 같은 말을 외치고 있는 듯한 통일성이.
이 동일한 방식의 재현 장면들로 인해 ‘나’는 광주로부터 멀어지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광주의 5·18 영화에서 느낀 거리감과 이질감은 광주에서 친구들과 만나면서도, 그리고 광주 밖의 5·18 영화에서도 감지하지 못했던 낯선 감각이었다. 이 거리감을 자아내는 반복적인 장면이 어디서 시작되는지 궁금했다. 앞으로 광주 시민으로 살아가기 위해 이 도시의 역사와 문화로부터 나를 멀어지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만 했다.
광주의 5·18 영화들에서 느낀 기이한 통일감은 주로 인물들의 특징과 관계 속에서 나타났다. 인물들은 크게 5·18을 경험한 자들과 경험하지 못한 자들로 나뉜다. 인물들의 특징과 관계는 대화 장면에서 선명하게 드러난다. 5·18의 당사자는 과거의 참상과 아픔을 토로하거나, 아픔을 이야기할 수 없었던 사실을 개탄한다. 대화 속에서 경험하지 못한 자들은 이들의 말을 경청한다. 물론 듣는 것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1980년 5월 광주 시민들이 경험했던 그날의 사건은 한국인이라면 모두가 알아야 하는 역사의 비극이다. 문제는 대화가 ‘일방적’이라는 점이다. 대화 속에서 5·18을 경험하지 못한 인물들은 보통 당사자의 경험을 듣거나 과거를 질문할 뿐, 대화 속에서 자신의 입장을 드러내지 않는다. 사관학교의 교관과 교육생의 관계처럼 질문에 대한 답은 정해져 있고, 되묻는 일이나 다른 대답은 허용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과연 이유가 무엇일까.
5·18은 오랫동안 일체의 발설이 금지된 사건이었다. 5·18에 대한 보도를 금지한 군사정권 시기는 물론, 1997년 5·18이 국가기념일로 제정되기까지 5·18은 광주 밖으로 나가서는 안 될 금기였다. 긴 세월 발설될 수 없었던 5·18은 ‘광주사태’, 심지어는 ‘폭동’이라는 오명까지 써야만 했다. 결국 외부에서 강요된 침묵이 당사자들의 상처를 더욱 악화시켰고 5·18을 광주에 고립시켰다. 이러한 상황에서 영화는 이들의 고통을 어루만졌다. 특히 광주의 5·18 영화들이 그랬다. 광주의 5·18 영화들은 5·18의 참상과 상처받은 이들의 아픔을 스크린 위에 충실하게 재현하였고, 영화 속 인물들은 현실에서는 누구도 들어주지 않았던 당사자들의 말에 공감을 표한다. 지금까지 광주의 5·18 영화들이 그리는 ‘일방적’ 대화 장면들은 5·18의 진상을 알리고, 살아남은 사람들의 상처와 죄의식을 치유하고자 했던 광주 사람들의 정서적 공감대를 반영하고 있는 셈이다.
5·18을 경험하지 못한 세대이자 이주자인 나 역시 광주의 5·18 영화들이 진행해온 작업들을 귀중하게 생각한다. 40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5·18의 진상규명은 완전히 해결되지 않았다. 때문에 피해자들의 상처는 아물 수 없고 5·18 역사의 기념은 어떤 누구에 의해서도 훼손될 수 없다. 하지만 현실의 문제들이 5·18을 기념하는 일만으로 해결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다양한 층위의 이주자들이 느끼는 이질감이나, 광주 청년들이 겪는 지역의 문제들은 ‘과거’를 듣는 것만으로는 해소되지 못했다. 적어도 5·18의 진상을 듣는 것과 더불어 현실의 사회적 문제들과 연관해서 5·18을 이야기하는 작업이 필요한 까닭이다.
그러나 이 역시 현실에서는 어려운 일이다. 끝나지 않은 역사의 비극 앞에서 이주자와 청년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당사자들 앞에 털어놓기 어렵다. 영화와 마찬가지로 여기 현실에서도 5·18을 겪지 못한 청년 세대나 이주자들에게는 5·18에 대해 스스로의 목소리로 말할 수 있는 지위는 주어지지 않는다. 자신의 목소리를 꺼내기에 앞서 ‘나의 말이 5·18을 모독하지는 않을까’ ‘나의 말로 인해 내가 광주로부터 배제되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과 두려움이 앞선다. 자신의 입장을 드러내기보다는 듣기만 하고 침묵하는 것이 5·18을 경험하지 못한 청년들이나 이주자들에게는 손쉬운 생존법일지도 모른다. 결국 종결되지 않은 역사의 비극이 암묵적으로, 경험한 자를 ‘말하는 자’로 고정하고 경험하지 못한 이들을 ‘듣는 자’의 위치로 질서 지우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암묵적 질서가 작동하는 현실 속에서 나를 비롯한 이주자와 1980년 이후에 태어난 광주의 청년들은 끝내 이방인이 될지도 모른다.
이제 이런 암묵적 질서에 균열을 내야만 한다. 말하는 자와 듣는 자를 고정시키는 암묵적 질서는 광주 밖 사람들은 물론 광주 안의 청년들을 이방인으로 전락시킨다. 5·18이 자신의 삶에서 어떠한 의미를 갖는지 말할 수 없다는 것은 5·18을 과거의 광주에 고립시킬 뿐이다. 5·18은 어머니, 아버지, 지식인, 학생, 넝마주이, 성매매 여성들 모두가 함께했던 공동체이자, 자신의 목소리를 냈던 광장이었다. 다시 말해 개개인의 차이를 보존하면서도 하나의 공동체를 이룩했다고 평가받는 40년 전 광주는 광주의 5·18 영화들처럼 일방적인 관계를 상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암묵적 질서를 허용하지 않았기에 평등한 공동체를 이룩할 수 있었다. 5·18의 현재성이 광주에 여전히 요청되는 것은 바로 이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발 딛고 서 있는 탈진할 것 같은 삶에서 벗어나 다른 삶의 가능성으로 나아갈 수 있는 꿈의 근거를 5·18과 광주에서 찾아낼 수 없다면 5·18은 영원히 저 동어반복의 기념비에 갇힐 뿐이다. 경험한 자와 경험하지 못한 자의 이분법을 넘어 서로가 직면한 현실을 함께 이야기할 수 있을 때 5·18은 현재성을 지닐 수 있다. 때문에 ‘나’는 그들이 만든 거대한 기념비 앞에서 묵념만 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경험했고 마주하는 현실에 대해 스스럼없이 이야기하고 싶다. 우리가 광주의 여러 장소에서 느낀 거리감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조목조목 이야기하고, 우리의 목소리가 다른 이들의 목소리와 공명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다. 광주에서 살기 위해서다.
※편집자주: 한칼 공모를 통해 선발된 독립연구공동체 ‘광주모더니즘’은 격주로 광주의 현실과 개별의 삶을 이야기한다. 어제의 광주와 오늘의 광주, 5·18 세대와 5·18 이후 세대의 소통을 꾀함으로써 지역의 문제를 딛고 한국 사회의 문제를 짚는다. 다음 차례는 또 다른 한칼 선정자인 부산 기반의 젠더·어펙트연구소가 맡는다. ‘한반의반도’는 한반도에서 또 나머지 반(半)으로 구별, 인식되는 ‘지역’으로부터의 발화를 심도 있게 담아보고자 한다.
정찬혁 | 광주모더니즘
전남대 대학원 박사과정(철학)을 수료하고 헤겔의 변증법을 주제로 논문을 준비 중이다. 관심 분야는 사회·정치철학, 영화비평, 지역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