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살 청년이 ‘이충걸의 세시반’을 먼저 읽고 그리다. 김예원
이충걸 | 에세이스트
사월 늦은 봄, 꿈속에서 꿈을 꾸었다. 정확히 꿈속에서 잠이 들었다. 암막 커튼이 눈을 덮은 것처럼 빈틈없는 어둠이 눈을 덮고 있었다. 어느 순간 장면이 바뀌듯이 검정이 걷혔다. 감은 눈 밖이 밝았다. 눈을 떴을 때 나는 알았다. 내가 환생했다는 것을.
그곳은 티베트였고, 나는 서너살쯤 된 사내아이였다. 그 집은 고지대의 허리께에 있었다. 밖을 보니 겨울이 남은 평원에 회갈색 관목이 듬성듬성했다. 재색 구름 아래 새 잎이 돋아날 아무 기미도 보이지 않았지만, 나무들은 벌처럼 모든 걸 아는 것 같았다. 그런 풍경은 어디에서 본 적 있다고 생각했다. 꿈속에서 느끼는 기시감이란 어떤 종류의 것일까.
흐릿한 빛 속에 나의 새 부모가 앉아 있었다. 유순한 얼굴들은 묘석에 그려진 그림과 비슷했다. 나는 말했다.
“사실 저는 전생에 한국에서 살았어요. 글을 쓰고 잡지를 만들던 남자였고, 여러 나라를 다니면서 많은 세상을 보았어요.”
그들은 내 말을 믿지 않았지만 내가 망상에 가득 찬 아이라고 비난하지도 않았다. 신중한 분들이었다. 티베트에서 환생이란 보다 익숙한 개념이겠지만 전생을 이야기하는 자식을 쉽게 수긍하긴 어려웠을 것이다.
그곳은 라싸 같은 큰 도시가 아니고 읍 규모의 작은 마을이었다. 그사이 여덟살로 자란 나는 부모를 따라 시내 구경을 갔다. 만다라로 덮인 사원에 들렀던 부모가 공룡이 살 것처럼 빽빽한 공원을 산책하는 사이 나는 마냥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피해 골목을 걸었다.
모퉁이에 보석을 파는 작은 가게가 보였다. 통유리 안에 까만 옷을 입은 여성이 고개를 숙인 채 진열장을 정리하고 있었다. 나는 전생(즉, 지금의 생)에서 구면이던 그녀를 단박에 알아보았다. 문을 열고 가게로 들어가자 몸을 낮게 구부리고 있던 그녀가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보았는데, 그때 언제나처럼 짓궂은 생각이 들었다.
“왜 내 장례식에서 울어주지 않았어? 내가 세상에 없다는 게 슬프지 않았어?”
그녀가 너무 큰 소리로 우는 바람에 오히려 이편이 민망해 그냥 가게 밖으로 나오고 말았다.
담과 바닥이 온통 붉은 다른 골목에선 체구가 큰 여성이 향을 팔고 있었다. 그녀는 내가 환생한 아이인지 바로 알아보고 자기 이야기를 꺼냈다.
“전생에 나는 나라에 전란이 있을 때, 아사 직전의 병사들에게 젖을 나누어 주던 유모였어요.”
하나도 이상하지 않았다. 꿈속의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만 보였다. 나는 생각했다.
“어떤 책에서 읽었는데 사람들이 환생을 거듭하는 것은 새로 받은 삶으로부터 배울 게 있어서라고 했어. 부처라면 더 이상 윤회할 필요 없는 거지. 내가 생을 한번 더 살게 되었지만 이것도 좋아. 여기가 서로 미워하며 물어뜯는 나라가 아니라 티베트라서 더 좋아.”
꿈에서 깰 때 나는 미소 지었다. 꿈의 세부가 얼마나 선명한지 부모 얼굴도 집도 들판도 보석 파는 여성의 머리칼도 극사실화로 그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꿈은 단순한 생물 활동이라기보다 최근 영성 가득한 책들을 읽은 결과일 것이다. 꿈은 잠재의식의 혼란된 반영이니까 나의 기질과 내세의 추리가 맞물렸을 것이다. 어쩌면 논리적 추리를 비논리적 두려움에 적용시킨 표면적 철학의 열매였거나, 분자적으로 경험한 불안의 한 측면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꿈에서 깬 뒤 감정적 되새김이랄까, 나의 역사에 어떤 지점이 생긴 것 같았다.
나는 판타지와 꿈을 현실로 만들 돈도 없고 도덕적으로 빈틈없는 사람도 아니지만 생활 속에서 작은 기쁨을 찾는 재능이 있다고 믿었다. 나의 산문은 진실에서 점점 멀어져 가지만, 세상에 일어나는 일들을 고민하는 것만으로 시민 됨의 명분을 찾았다. 그러나 삶의 어느 때가 되면 단지 살아 있다는 사실만으론 만족하기 힘든 순간이 온다. 솔직히 말하면 나 자신이 역겨운 모조식품처럼 짜증스러웠다. 너무 자주 현실에서 탈출해 모든 걸 리셋하고 싶었다. 다른 나라에서 다른 사람으로 살았다면 어땠을까.
그러나 우리는 일회한 삶을 사는 확정적인 개체이기 때문에 다시 태어날 수 없다. 나에게 혹시 새 삶이 주어져 과제를 마친다 해도 완전히 개선된 사람이 될 것 같지도 않다. 그다음에 어떻게 변할지는 나도 모르는 일이니까.
이젠 우리가 하늘이라는 유기체의 입자거나 우주적 프로그램에 연결된 하드웨어의 부분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단지 매일매일의 작은 기적을 알아챌 수 있다면 환생 없이도 몇번의 인생을 살 수 있다고 믿을 뿐이다. 정말 중요한 것은 많이 사는 게 아니라 가득 사는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