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은 광주만의 것이 아니다. 당시 목포, 나주, 해남 등지에서도 동참 시위 등이 이어졌다. 정권에 의해 지어진 ‘경계’를 허물며 ‘절대공동체’가 추구된 셈이다. 5·18을 배경으로 한 영화 <택시운전사>의 스틸컷.
공동체가 내부와 외부로 굳어질 때, 외부가 되어야만 하는 사람에게는 고됨과 고역이 반복되곤 한다. 그리고 그 외부를 감당하는 이들이 대체로 누구인지 우리는 알고 있다. 철저한 외부자들의 도시로 낙인찍혀 무자비한 폭력을 당했던 1980년의 광주가 해방의 공동체를 구성할 수 있었던 것처럼, 외부는 내부가 될 수 있고 내부는 외부가 될 수 있다.
내부와 외부를 가르는 은근한 경계를 의식하게 된 것은 순천이라는 지역으로 이주하고 나서다. 그곳의 내부로 스며들어가야 하는 도시재생활동가로 살면서 비로소 알게 된 것이다. 내부였던 광주와는 거리감이 생겨나고 있지만, 내가 순천과 그만큼 밀착되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계약’은 1년씩 연장될 뿐이고 연말에는 다시 광주로 돌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정책과 제도가 주는 혜택 때문에 주소지를 옮기긴 했으나, 공기업의 계약직에겐 해당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후에 알게 되었다. 원룸 계약도 1년씩 해야 하는 불안정한 상황을 앞으로 얼마큼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럼에도 순천에 길들여졌는지, 사랑하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종일토록 걷던 동천이며 ‘다라이’에 심은 무늬둥굴레며 동네의 곳곳이 벌써 몸이 되어버려 잊을 수도 없게 되었다. 물론 여전히 이 감각이 ‘남기 위한’ 발버둥인지, 사랑에 기초한 ‘관심’인지 반성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도 충분히 알고 있다. 그게 어떤 것이든지 일을 마치고 퇴근길에 걷는 호젓한 마을길에 마음을 빼앗긴 것만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나는 아직 순천의 안으로, 그렇다고 바깥에 놓일 수 없는 처지에 있다. 사람들은 ‘도시재생사업’이 끝나고는 어떻게 할 거냐며 나의 거취와 안부를 묻지만, 그건 어떤 염려와 걱정에서 비롯된 말은 아니다. 그 질문은 순천에서의 삶이 임시적인 방편이라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나 역시 대답을 주저하게 된다. 순천의 도시재생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구성원의 자격을 얻는 듯했지만, 철저히 ‘기능적으로 할당된 몫’만이 주어져 있을 뿐이었다. 이방인이었기 때문이다.
순천으로 이주하면서 배운 것이 이주자로서의 위치뿐만은 아니었다. 공동체의 은근한 경계는 의식하지 못한 한마디 말로 풀어질 수도 있다. 이주청년이자 기간제 공무원이라는 중첩된 나의 위치는 사업지구 내 마을 주민들에겐 여전히 외부자다. 사람들은 이러한 분위기를 환기하기 위해 작은 인사를 건넨다. 서로를 마주하는 머무름 속에서 오고 가는 대화들은 낯선 이에 대한 경계를 옅게 만든다. 골목에 식탁 의자를 내놓고 햇빛을 쬐는 할머니에게, 고무통 화분 위로 웃자란 식물을 가지치기하는 할아버지에게 말을 건넨다. “인사를 해야 해. 서로를 모르니까 무섬을 느끼고 피하게 되는 것이여. 인사 한마디면 그 사람은 별거 아니여, 아무렇지도 않아”라는 동네 할머니의 말은 조용한 마을 안에서 서로의 존재나 필요를 깨닫고 알아채려는 공동체적인 신호이자 배려로 느껴졌다.
한마디 인사를 시작으로 마을의 오래된 서사를 알게 되고, 구체적인 관계들을 맺게 된다. 1인가구인 나의 안부를 물으며 반찬을 가져다주는 동네 어르신은 마을의 소소한 일상도 덧붙여 공유한다. 물론 이런 관계 기반의 정보 네트워크가 마냥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인터넷으로 산 자전거에 바람을 넣기 위해 동네에서 단골 장사를 하는 자전거 가게를 찾았지만, 주인은 한눈에 이 자전거가 자신의 가게에서 판매된 적이 없다는 것을 알고, “산 데서 해”라는 말로 퉁명스럽게 거절한 적도 있다. 순천으로 이주하여 마주하는 관계들은 완전한 배제나 수용보다는, 공동체의 안과 밖의 경계에 아슬아슬하게 서 있도록 만든다.
공동체의 경계에 서 있는 일은 고되지만, 경계에서 벗어날 땐 그보다 더한 고역이 되기도 한다. 5월이면 문득 광주의 시민단체 활동가로 근무했던 때가 떠오르곤 한다. 지역국립대학의 무슨 과 출신으로 소개되고, 광주의 내부적 관계망 안에서 나의 자리를 부여받았지만, 그 관계 속에 녹아들기는 쉽지 않았다. 광주의 시민단체들 중 대부분은 5월이 다가오면 5·18과 연관된 기념사업이나 행사를 준비하느라 분주했고, 나를 비롯한 시민단체의 청년활동가들은 평소보다 몸을 재빠르게 움직여야만 했다. 5·18을 경험하지 못한 청년활동가들은 5월 동안 기념행사를 준비하고 진행하면서 5·18을 자신의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어엿한 지역 사회의 구성원으로 자리를 잡아가는 듯 보였다.
하지만 기념행사나 사업이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질수록 나의 삶과 마음은 5·18로부터 멀어지는 것만 같았다. 5·18을 기념하는 시민단체의 활동은 매우 의미 있고 중요하지만, 청년활동가에게 주어지는 근로조건은 열악했으며 잦은 당직과 시간 외 근무는 생활을 보장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물론 어떤 일이든 바쁜 시기는 있기 마련이고, 정부 보조금이나 개인 후원으로 운영되는 시민단체의 특성상 인력의 충원과 높은 급여는 기대하기 어려운 일이다. 다만 시민단체에서 청년활동가들의 업무가 대부분 단체의 주요 인사들이나 행사 진행을 ‘보조’하는 그림자 노동에 한정되어 있고, 그 일이 일상을 보장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청년활동가들을 광주의 내부에서 멀어지게 만든다. 결국 광주에서 내부 사람이라고 믿었건만 그 안에서 내부와 외부가 다시 분리되었을 때, 청년활동가는 내부를 보전하기 위해 애쓰는 외부 사람으로 서성거릴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순천으로의 이주를 결심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니, 도리어 ‘이주자’라는 분명한 외부의 정체성이라도 부여받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인권도시라고 호명되는 광주에서, 5·18을 기념하는 시민단체에 계약되고 고용되는 청년활동가들의 생활이 위태로운 상황에 놓여 있고, 그들이 광주의 내부로부터 멀어지고 있다면 ‘5·18은 무엇을 위해 기념되어야 하나’ 다소 무엄한 물음이 솟아나기도 한다. 5·18은 도시가 내세우는 브랜드나 상징적인 이미지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광주에 산재해 있는 어떤 문제든 해결할 수 있는 절대공동체의 정신으로 간주된다. 기념과 추앙으로 이루어진 5·18의 단단한 결속은 광주의 내부를 만들지만, 그 내부를 단단하게 만들기 위한 수고를 담당할 ‘외부’를 요구하고 있다.
1980년 5월의 절대공동체라는 말은 내부가 될 수 없었던 청년활동가나 이주자도 5·18을 맞이할 수 있도록 그 말들이 닿지 않았던 외부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실제, 5·18은 광주만의 것이 아니다. 광주가 진압된 뒤 목포역 광장에서는 수만명이 모여 민주화를 요구하는 횃불 시위를 열었다. 나주에서도 고립된 광주를 구하기 위해 무기를 들었으며, 해남에서는 3천여명이 모여 독재정권을 규탄하는 성토대회를 열고 완도와 진도 군민에게도 5·18 항쟁을 알리고 확산시켰다. 순천은 여순항쟁의 분위기 때문에 5·18 당시에는 침묵할 수밖에 없었지만, 전남 도처에서 5·18 항쟁이 있었기에 6월 항쟁으로 응답할 수 있었다. 그래서 해마다 5월이 되면 광주와 호남은 5·18의 뜻을 이어가고 공동의 기억으로 기념하고자 하지만 매년, 다른 지역에서도 ‘광주의 언어’만 강요될 뿐이다.
공동체가 내부와 외부로 굳어질 때, 외부가 되어야만 하는 사람에게는 고됨과 고역이 반복되곤 한다. 그리고 그 외부를 감당하는 이들이 대체로 누구인지 우리는 알고 있다. 철저한 외부자들의 도시로 낙인찍혀 무자비한 폭력을 당했던 1980년의 광주가 해방의 공동체를 구성할 수 있었던 것처럼, 외부는 내부가 될 수 있고 내부는 외부가 될 수 있다. 공동체의 경계는 애매하기도 하고 은근하기도 한 것이다. 그래서인지 문을 두드리거나 가벼운 인사처럼 공동체의 경계에서 이루어지는 작은 행위들이 내부와 외부를 전환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순천의 마을 어르신들이 낯선 존재들을 천천히 환대한 방식처럼.
순천 사람이 되어, 광주의 안쪽을 향해 문을 두드리는 바깥들을 만났다. 대구에서 광주로 이주하여 송정 5일시장 옆 골목에 자리를 잡아 천천히 빵을 구우며 삶을 이어나가는 친구를 만났고, 제도권 바깥에서 삶의 구체적 가능성을 만들어가는 현장의 연구자들이 있었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과 결속하는 아는 사람들이 점점 모르는 사람이 되어, 광주의 바깥이 되고 있는 중이기도 하다. 의식하지 않았던 또 다른 광주와 인사를 건넴으로써 광주의 ‘밖’과 접촉할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되어야 한다. 광주의 남이 당사자가 되어 광주의 5·18을 기념해야 한다는 철학자 김상봉의 혜안이 숙고되어야 하는 시점이기도 하다. 공동체의 환대가 아는 내부자들만의 결집이 아닌 모르는 바깥을 만나기 위한 가능성에서 시작된다는 것은 내가 광주와 순천, 그 언저리에서 얻게 된 지혜다.
최진아 | 광주모더니즘
순천시 도시재생과 저전동현장지원센터 팀장. 이전에는 광주 기반 여러 시민단체에서 활동했다. 에코 페미니즘, 지방여성청년, 노동 등에 관심을 두며 친환경적 삶과 지속가능한 소비를 고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