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로 가야 하나! 새정치민주연합이 방향감을 잃고 휘청거리는 모습이다. 재보선 참패의 후유증 탓이다. 옛 선장이 물러나고 새로 뽑힌 ‘임시선장’은 세월호 특별법 협상으로 비틀거린다. 사공들의 갑론을박이 끊이지 않아 배가 산으로 갈 지경이다. 뱃머리를 더욱 좌향좌하란 요구와 이제 우향우 한번 해보자는 주장이 교차한다. 안개 자욱한 바다 위, 바람은 드세고 물결은 거친데 갈 곳 몰라 표류하는 130석 제1야당의 신세가 처량하다.
먼저, 우클릭론. 임종석 서울시 정무부시장은 최근 <조선일보> 인터뷰에서 ‘중도 지향론’을 폈다. “선명성을 강화해야 한다는 진단 자체가 작위적이고 엉터리”이며, “정치 환경이 ‘7대3’ 내지 ‘6대4’ 정도로 보수가 우위인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30% 준거집단’을 바라보고 정치를 하면 안 된다. 51%의 국민과 꾸준히 대화하는 정치를 해야 한다”고 했다. “지금 야당은 노선이나 정책이 상당히 치우쳐 있고, 과도하게 사회·정치적 문제에 집착하고 국가 운영과 관련된 의제에는 소홀하다”고도 했다.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도 있을 테고, 쯧쯧 혀를 차는 사람도 있을 거다. 어쨌거나 전대협 의장 출신인 ‘486 운동권 그룹’의 대표주자 임종석이 한 얘기다.
다음은 좌클릭론. 13년 전인 2001년, 정동영은 정책적으로 당내 우파그룹에 속했다. 언론의 이념성향 조사에서 당내 의원들 가운데 상당히 오른쪽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이듬해 제주에서 치러진 첫번째 대선후보 국민경선에서 정동영은 “노무현 후보는 과격한 이미지와 불안정함으로 이회창 후보를 이길 수 없다”고 색깔론 비슷한 공격을 폈다. 나중에 사과하긴 했지만 그 무렵 정동영의 색깔을 잘 보여주는 일화다. 그 정동영이 지금은 ‘유능한 진보정당의 길’을 항로로 제시하며 당내 가장 왼쪽에 서있다. 그는 말한다. “과거엔 진보라는 말을 무서워서 잘못 썼지만 이제 주눅이 들 필요가 없다. 800만 비정규직, 300만 영세자영업자에게 야당이 집권하면 희망이 생기겠구나 하는 믿음을 주는 유능한 진보여야 한다. 진보정권으로 교체하자.” 번지수를 잘못 짚었다고 비판하는 이들도 있을 테고, 야당의 갈 길을 제대로 제시했다는 평가도 있을 거다.
정동영이 61살, 임종석이 48살이니 두 사람, 13년 차이다. 13년 전에 정동영은 지금의 임종석과 비슷했고, 그때 임종석은 지금의 정동영과 닮았다. 임종석이 앞으로 13년 뒤에 정동영과 비슷한 얘기를 할까? 모르겠다. 인생유전, 돌고, 도는 인생이라더니, ‘정치유전’, 정치도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재보선 이후 ‘486 운동권 그룹’의 대표주자 임종석은 우클릭을, 당내 우파그룹에 속했던 정동영은 좌클릭을 주장하고 있다. 10년 전과 정반대라는 점에서 ‘정치유전’이라 할 만하다. 새정치민주연합 당사 안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 흉상 옆에 세월호 침몰 참사 가족대책위 가족들이 세월호특별법 재협상을 촉구하며 붙여놓은 손팻말.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한편에선 ‘486 정치인’에 대한 비판이 터져나온다. 그중에서도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의 비판이 가장 매몰차다. “그들은 거의 30년째 학생회장을 하고 있을 뿐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지도 못했다. 새정치민주연합 내의 진정한 올드보이는 이들보다 10년쯤 위인 정동영·천정배가 아니라 바로 이들 486이다.” ‘486 운동권 그룹’이 도대체 무슨 잘못을 저질렀느냐고 궁금하게 생각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비판론자들이 겨냥하는 핵심은 한마디로 ‘제구실 못한 죄’다. 김대중, 노무현 두 정치 거목이 사라진 이후 새정치연합은 고만고만한 몇 명의 계파 보스들이 모든 걸 주도하는 구조다. 중요한 의사결정들이 계파들의 담합에 따라 좌우된다. 7·30 재보선의 ‘우왕좌왕 공천’이 그랬고, 19대 총선 공천 역시 마찬가지였다. 결과가 좋았다면 몰라도 선거를 하는 족족 연전연패다. 2004년 17대 총선 이후 ‘486 운동권 그룹’은 핵심 당직을 번갈아 맡았다. 계파를 움직이는 보스의 돌격대 구실에 충실히 복무한 것이다. 그러다 보니 독자적 목소리를 내지 못한 채 당을 혁신할 에너지를 소진하고 말았다. 이들의 나이가 벌써 50대 안팎인데 당의 쇄신을 추진할 역동성은 잃어버렸고 새로운 지도력을 키우지 못한 채 세대교체의 기수로 성장하지도 못했다.
재보선 패배 이후 야당의 모습은 잿더미 가득한 폐허를 떠올린다. 새정치연합이 겪은 충격과 패배의 쓰라림은 총선이나 대선 패배에 못지않다. 이유가 있다. 상대가 잘해서 졌다면, 질 수밖에 없어서 이유 있게 패했다면 상처가 이토록 깊지 않을 것이다. 질 수가 없는 상황에서, 져서는 안 되는 선거를, 상대가 잘하지도 않았는데 참패했다는 점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야당의 실력 부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결과였다. 야권 지지층에서 어느 때보다 새정치연합에 대한 성토가 빗발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재보선 결과는 야권에 근원적 변화를 요구한다. 깊고 넓으며 지속적인 혁신이 필요한 상황이다. 유감스럽게도 이런 움직임은 보이지 않는다. 이번에도 기둥과 들보는 바꾸지 않고 대충대충 서까래만 갈아끼우려는 기색이 농후하다.
논쟁은 무성하다. 하지만 좌클릭, 우클릭 논쟁은 좀 지긋지긋하다. 수많은 논쟁이 있었지만 생산적 결론에 이르기보다 소모적 신경전으로 끝나기 일쑤였다. ‘실용 vs 개혁 논쟁’, ‘난닝구 vs 백바지’ 등 가시 돋친 논쟁이 일었지만, 대부분은 시작은 창대했으되 나중은 심히 미약했다. 구체적 노선과 정책이 아니라 ‘진보냐 중도냐’, ‘우회전 깜박이냐, 좌회전 신호냐’ 따위의 추상적 구호가 논쟁의 축이었다. 논리는 화려하고 말솜씨는 능란했지만 ‘그들만의 논쟁’에 국민은 눈길을 돌리지 않았다.
새정치연합엔 무려 130석이 남아 있다. 의석으로만 보면 야당이 이토록 강성한 적도 없다. 그럼에도 어젠더를 만들고 실행하는 힘은 과거보다 현저히 떨어진다. 이완구 새누리당 원내대표와 박영선 새정치민주연합 원내대표가 지난 7일 오후 국회 귀빈식당에서 세월호특별법 처리를 놓고 입씨름이 벌어지고 있다. 이정우 선임기자 woo@hani.co.k
노무현은 정치의 본질을 어젠다라고 봤다. “어젠다를 만들고 그것을 통해 세력으로 결집하는 게 정치다. 그러므로 정치인은 새로운 어젠다를 만들고 끊임없이 던져서 국민에게 생각이라도 해봐 달라고 해야 한다.”(강원국, <대통령의 글쓰기>) 야권의 당면 과제는 좌클릭이나 우클릭을 논하는 일이 아니라 더블클릭을 하고 엔터키를 누르는 게 아닐까 싶다. 바로 어젠다를 만들어내 국민에게 던지는 일 말이다. 왼쪽이건 오른쪽이건 실행을 못 하고 변죽만 울리는데 심드렁한 반응이 나오는 건 당연지사다. 최종 기착지를 명료하게 보여주고 운전실력을 솜씨로 입증하는 것이 골백번의 좌우논쟁보다 훨씬 강력한 법이다.
‘상유십이(尙有十二)’, 영화 <명량>에서 이순신은 12척의 배로 물러서지 않고 싸워 이겼다. 새정치연합엔 무려 130석이 남아 있다. 의석으로만 보면 야당이 이토록 강성한 적도 없다. 김대중은 국민회의 79석으로 집권했고 노무현이 대통령이 됐을 때도 민주당 의석은 115석이었다. 길은 왼쪽과 오른쪽으로만 나 있는 게 아니다. 더 아래로, 더 깊이 내려가는 길도 있다.
임석규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