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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대통령실

안대희는 ‘잠룡’을 꿈꾸는가

등록 2014-05-25 15:41수정 2014-05-30 14:12

[임석규의 ‘정치 빡’]
이회창·고건·정운찬…‘용’이 되길 원했던 총리들
‘안대희 꿈’은 ‘김기춘의 힘’과 양립하기 어렵다
편집자 주

정치, 그 속엔 세상의 오욕과 칠정이 다 들어있습니다. 치욕과 영광이 교차하며 탐욕과 연민이 뒤섞이고 투쟁과 타협이 공존하는 공간이 바로 정치입니다. 그곳을 향해 무수한 손가락질이 쏟아집니다. 그래도 정치의 진흙탕을 거치지 않으면 우리가 사는 이곳은 제대로 바뀌지 않습니다. 정치가 더럽고 구역질난다고 외면하기만 하면 현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하다못해 담벼락을 쳐다보고 욕이라도 하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따금, 정치 안팎의 잡사를 들고 찾아뵙겠습니다. 표리가 부동한 현실의 정치판을 조금이나마 쉽고 정확하고 재미있게 이해하는 데 작은 보탬이라도 되기를 바랍니다. 정치에 무관심한 눈으로 세상사를 바로 보긴 어려울 테니까요.


임석규 논설위원은 기자 생활 대부분을 <한겨레> 정치부에서 보냈으며 정치부장과 정치·사회에디터 등을 거쳐 지금은 정치 분야 사설과 칼럼을 쓰고 있다.

국무총리 후보자로 지명된 안대희 전 대법관이 스스로 ‘책임총리’를 천명했다. 정확히는 “책임총리의 자세로 대통령에게 진언하겠다”라고 했다. 안대희 후보자, 아직 대통령과 총리의 철저한 ‘갑을관계’를 모르는 모양이다. 책임총리는 되겠다고 해서 될 수 있는 그런 자리가 아니다. 대통령이 ‘책임총리’의 성격에 걸맞게 운용할 때 비로소 책임총리는 탄생한다. 안대희가 ‘책임총리의 자세’라고 말했기에 망정이지, 만약 ‘책임총리가 되겠다’라고 했다면 그건 대통령의 ‘역린’을 건드리는 거다. ‘내가 책임총리가 될 테니 대통령은 그에 맞춰 권한을 축소해달라’고 요구한 셈이니 말이다. 명실상부한 책임총리제는 대통령의 권력 축소로 이어진다. 대통령으로선 달가울 리 만무하다. 대통령의 강력한 의지 없는 책임총리제는 말짱 도루묵인 거다.

안대희 국무총리 후보자가 22일 오후 총리 후보자로 지명된 직후 정부서울청사 브리핑룸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김성광 기자 flysg2@hani.co.kr
안대희 국무총리 후보자가 22일 오후 총리 후보자로 지명된 직후 정부서울청사 브리핑룸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김성광 기자 flysg2@hani.co.kr
안대희, 너무 쉽게 ‘책임총리’를 입에 올렸다. 자칫 잘못하면 얼마 못 가서 ‘책임지는 총리’가 되는 수 있다. 대통령이 져야 할 책임의 십자가를 대신 짊어지고 군말 없이 떠나줘야 하는 사람 말이다. 책임총리제는 박근혜 대통령의 대선 공약이었다. 정홍원도 책임총리가 되고 싶어 했다. 하지만, 온갖 국정에 일일이 관여하는 ‘박근혜식 만기친람 깨알리더십’에 책임총리가 설 자리는 한 뼘도 없었다. 정홍원 총리의 운명이 이를 선연하게 입증한다. 대통령 책임론이 떠오르자 단칼에 ‘시한부 총리’가 되고 말았지 않은가. 물론, 안대희는 박근혜 캠프에서 책임총리제 공약을 다듬은 당사자다. 그게 뭐 어쨌다는 말인가. 안대희가 자신은 정홍원과 다르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착각이다. 대통령 앞에서 총리는 한없이 작아질 수밖에 없다. 총리란 그런 존재다.

총리엔 ‘관리형 총리’와 ‘용꿈’을 꾸는 ‘잠룡 총리’가 있다. 국회에서 대통령 대신 연설문을 낭독하는 ‘대독총리’, 대통령을 대리해 이런저런 행사에 낯을 내미는 ‘얼굴마담 총리’는 그냥 ‘관리형 총리’일 뿐이다. ‘잠룡 총리’는 ‘1인지하 만인지상’의 위치에 만족하지 않는다. ‘1인’의 치하를 벗어나 ‘오로지 만인지상’의 자리에 오르기 위해 끝없이 분투한다. 그들은 삼청동 총리공관이 좋긴 하지만 이웃한 청와대에 견주면 비할 데 없이 초라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이회창, 고건, 정운찬 등이 바로 ‘잠룡 총리’의 이름이다.

왼쪽부터 이회창, 고건, 정운찬
왼쪽부터 이회창, 고건, 정운찬

안대희는 총리가 된다면 ‘관리형’에 머물지 않을 사람이다. 많은 사람이 그의 ‘야심만만’을 얘기한다. 그는 ‘목표 관리형 인간’이다. 일정한 성취 목표를 설정해놓고 이를 달성하기 위해 준비하고 노력하고 관리해나가는 스타일이다. 그는 대법관을 그만둔 뒤에도 로펌에 취직하지 않았다. 집도 강북에 있다. 남 눈치만 살피는 스타일이 아니면서 결정적 상황에서는 고개를 숙일 줄도 안다. 그렇게 자신을 관리하며 살아왔다. 그래서인지 그는 ‘청렴하고 강직하며 깐깐한 사람’이란 대중적 이미지를 얻었다. 목표 관리형 인간의 특성은 목표했던 바를 달성하면 곧바로 다음 단계의 목표를 설정한다는 점이다. 총리에 오른 이후 목표로 삼을 수 있는 자리는 단 하나, 바로 ‘용상’이다. 물론, 그렇지 않은 것처럼 보이도록 철저하게 위장하는 게 더없이 중요하긴 하다. 하지만 안대희는 야심을 너무 일찍 드러냈다. 그것이 훗날 그의 치명적 약점이 될지도 모른다. 그의 ‘책임총리론’은 그래서 위험하다.

‘용꿈’을 꾸는 그 순간부터 총리에겐 비극이 깃든다. 우리 헌정사에서 국무총리가 대통령이 된 전례가 드물다. 군부 쿠데타로 8개월 동안 대통령을 했던 최규하가 있지만 그건 예외적 상황이었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 헌법 86조는 ‘대통령을 보좌하며, 행정에 관하여 대통령의 명을 받아 행정 각부를 통할’하는 사람을 국무총리로 규정한다. 이 조항만 보면 총리, 이거 정말 애매모호한 자리다. 그냥 대통령을 보좌하는 사람이란 얘기니 말이다. 대통령의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으니 자신만의 독자적 목소리를 내기가 정말 쉽지 않다. 그러다 보면 ‘2인자 이미지’가 굳어지고 대중들은 ‘저 사람, 대통령감은 아니군’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대표적 사례가 정운찬이다. 총리가 되면서부터 ‘잠룡’ 반열에 올랐지만 ‘행정수도 이전 백지화’라는 이명박 대통령의 총대를 대신 짊어지고 철저하게 대통령 뜻에 순응했다. ‘2인자 역할’을 넘어서지 못한 총리에게 대선 도전 기회는 오지 않았다. 총리는 그런 자리다.

그래서 총리가 ‘용꿈’을 꾸기 시작하면 무리를 하게 된다. ‘2인자 이미지’를 벗어내려면 독자적 목소리를 내야 하고 대통령을 치받지 않을 수 없다. 이회창이 그랬고, 고건이 그랬다. 이회창은 대통령 김영삼과 자주 충돌을 빚다가 해임이 예상되자 “허수아비 총리는 안 한다”며 총리 취임 127일 만에 사표를 내고 ‘선방’을 날려버렸다. 김영삼은 총리에게 멱살을 잡힌 꼴이 됐고 이회창은 ‘대쪽’이란 영예를 얻으며 유력한 차기 주자로 떠올랐다. 고건 역시 막판에 국무위원 제청권을 두고 노무현 대통령과 ‘맞짱’을 떴고, 이를 밑천 삼아 단번에 지지율 1위의 대선주자 반열에 올라섰다.

그러므로 대통령은 용꿈 꾸는 잠룡 총리를 싫어하는 법이다. 다른 선택지가 없을 정도로 민심이 나빠졌을 때, 피할 수 없는 ‘외길수순’의 궁지에 몰렸을 때에만 예외적으로 꺼내드는 게 잠룡 총리 카드다. 박 대통령도 안대희 만은 피하고 싶었을 거다. 언젠가 자신을 베는 검(劍)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을 테니 주저하고 고심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박 대통령이 안대희를 총리로 선택한 것은 무엇보다 청와대에 김기춘 비서실장이라는 ‘완충장치’가 있다는 점을 감안했다고 본다. 안대희의 하늘 같은 검찰, 서울법대 선배이자 같은 경남 출신인 김기춘 실장이 청와대 안에 굳건히 버티고 있으면, 천하의 안대희도 어렵지 않게 제압할 수 있을 거라고 박 대통령은 판단하지 않았을까.

안대희 후보자 박근혜캠프 시절 안대희 신임 국무총리 후보자(오른쪽)가 2012년 11월6일 서울 여의도 당사에서 당시 박근혜 새누리당 대통령 후보와 정치쇄신안을 발표하기 위해 함께 들어서고 있다. 당시 직책은 새누리당 정치쇄신특별위원장이었다. 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안대희 후보자 박근혜캠프 시절 안대희 신임 국무총리 후보자(오른쪽)가 2012년 11월6일 서울 여의도 당사에서 당시 박근혜 새누리당 대통령 후보와 정치쇄신안을 발표하기 위해 함께 들어서고 있다. 당시 직책은 새누리당 정치쇄신특별위원장이었다. 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안대희가 나이 차가 16년에 이르는 ‘김기춘 왕실장’의 위세에 눌리면 미처 용꿈의 날개를 펴기도 전에 ‘관리형 총리’로 끝날 수도 있다. 김기춘은 비서실장에 임명된 직후 첫 브리핑에서 “윗분의 뜻을 받들어”라는 지극히 생경한 극존칭 화법을 선보이며 ‘아부’에도 단수가 있다는 걸 보여준 인물이다. 박 대통령의 취임 1주년을 맞이해선 ‘멸사봉공’(滅私奉公·사를 버리고 공을 위해 일한다), ‘사위지기자사’(士爲知己者死·선비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란 문구를 적어 대통령에게 바쳤다. ‘윗분’에 대한 한량없는 충성을 이보다 더 노골적으로 보여주는 표현을 찾기란 쉽지 않다. 김기춘의 힘은 바로 대통령에 대한 ‘무한충성’, 여기에서 나오는 거다. 그 결과, 박근혜 정부에서 ‘1인지하 만인지상’은 정홍원 총리가 아니라 김기춘 비서실장이었음은 천하가 다 아는 얘기다. 세월호 침몰의 여파로 여권에 휘몰아친 거친 인사쇄신의 파고 속에서도 김기춘은 대통령의 여전한 신임을 과시하며 건재했다. 이것이 보여주는 바는 명확하다. 앞으로도 국정운영의 주축은 내각이 아니라 청와대가 될 것임을 예고하는 거다.

그러므로 ‘김기춘의 힘’은 ‘안대희의 꿈’과 양립할 수 없다. 안대희가 ‘잠룡 총리’가 되려면 먼저 ‘사실상의 부통령’으로 군림해온 ‘김기춘의 벽’을 넘어서야 하는데 그게 그렇게 쉽지 않다. ‘나를 버리고 목숨을 내놓고 윗분의 뜻을 받들겠다’고 천명한 김기춘, 그리고 첫마디로 대통령의 권한 축소를 뜻하는 책임총리를 내뱉은 안대희, 두 사람에 대한 대통령의 신뢰가 똑같을 수 있을까. 박 대통령이 안대희의 말을 듣고 무슨 표정을 지었을지 정말 궁금하다. 안대희 역시 ‘비정상의 정상화’, ‘국가 개조’ 등 박 대통령이 부쩍 강조한 용어들을 쓰긴 했지만 충성고백의 강도에서 김기춘에 비하면 족탈불급이었다. 안대희로선 김기춘을 본따 충성을 맹약하고 대통령에 맹종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고유한 색깔을 잃고 2인자 노릇이나 하는 사람이 ‘용꿈’을 현실화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 안대희의 딜레마가 있다. 안대희와 김기춘이 앞으로 어떤 관계 설정을 해나갈지, 그리고 박 대통령이 두 사람에 대한 신뢰를 어떻게 배분할지, 그것이 권력의 향방을 가늠할 수 있는 흥미로운 관전포인트로 떠올랐다.

임석규 논설위원 sk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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