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전 서울시장은 현대건설의 회장으로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총애를 받았다. 1984년 기자회견장에서 정 명예회장과 함께한 모습.(사진 / 연합) 한겨레21
[대선후보 리더십검증]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 ②
고 정주영 현대 회장과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는 현대건설의 역사에서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였다. 기업가 이명박은 ‘왕회장’ 정주영의 빛과 그늘을 동시에 떠안았다. 정 회장이 나중에 정계에 뛰어들면서 스스로 고백했던, 정경유착의 검은 그림자 역시 기업가 이명박에게도 드리워져 있다. 석연찮은 왕 회장과의 결별은, 비정한 재벌의 세계에서 영원한 적도, 동지도 없다는 점을 보여줬다.
■ 개발경제의 어두운 그림자, 정경유착 = 이명박은 서울시장 재임 시절인 2003년 7월 <신동아>와의 인터뷰에서, 관급 공사 수주와 관련한 현대건설의 로비 관행을 묻자 “나는 모르죠. 오너들이 했으니까. 그렇게 공개적으로 하다가 전두환 정권 이후에 비밀리에 하는 걸로 바뀌었어요”라고 답했다.
그러나 당시 기업관행과 현대건설 특유의 ‘사풍’을 고려할 때, 77~91년까지 14년간 사장·회장을 지낸 이명박이 현대건설의 금품로비 사실을 전혀 몰랐다고 볼 수는 없다.
실제로 ‘노태우 전 대통령 비자금 수사’가 한창이던 1995년 11월 당시 신한국당 의원이었던 이명박은 검찰에서 조사를 받았다. 이때 검찰은 91년 현대건설 사장이던 이명박이 석유개발공사가 발주한 석유비축기지의 공사 수주와 관련해, 유각종 전 석유개발공사 사장에게 사례금을 준 사실을 시인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 후보는 기소되지는 않았다. 안강민 당시 대검 중수부장은 “이명박 의원은 유 전 사장의 강제에 따라 돈(8억여원)을 냈고 액수도 관례로 인정할 만했다”고 그 이유를 설명했다.
당시 이 사건 수사를 담당했던 문영호 변호사는 <한겨레>와의 전화통화에서 “유 전 사장이 노태우 전 대통령에게 정치자금을 전달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50억원을 모았고, 여기에 이 후보가 돈을 낸 것”이라고 말했다. 역시 이 사건 수사에 참여했던 김성호 전 법무장관도 “이 후보는 현대 계열사의 사장이었고, 당시 검찰 수사는 각 그룹의 회장들을 중심으로 이뤄졌기 때문에 입건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돈에 대가성이 전혀 없었다고 보긴 힘들다. 91년 6월 현대건설은 석유개발공사에서 발주한 여천 석유비축기지 공사를 646억원에 따냈다. 그때 현대건설이 써낸 낙찰가는 공사 예정 금액의 94.2%. 대부분의 국책공사가 공사 예정 금액의 80% 안팎 수준에서 낙찰되곤 했던 관례를 보면 94%가 넘는 공사 금액을 써냈다는 것은 예정가가 사전에 누출됐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
94년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상무대(군 전투병과학교) 교외 이전 공사 비리에도 현대건설은 연루돼 있다. 1991년 현대건설은 청우와 이 공사의 공동 도급자로 낙찰됐는데, 청우는 뒤늦게 공사에 참여하면서도 이 회사 연간 도급액의 2배가 넘는 공사 지분을 받는 특혜를 받았다. 이 과정에서 청우는 군 간부들에게 뇌물을 준 사실이 밝혀졌다. 94년 국회의 국정조사에서 청우 쪽은 “현대건설이 상무대 본공사를 낙찰받은 것은 청우가 미리 빼낸 입찰예정가를 현대쪽에 알려줬기 때문”이라고 폭로했다. 같은해 말 건설부는 현대건설이 상무대 아파트를 설계와 다르게 시공하는 등 건설업법을 위반하고 하도급 통지 의무를 29차례나 위반한 것에 대해 8350만원의 과징금·과태료 부과 처분을 내렸다. 문제는 현대건설 사장 시절 알게, 모르게 이뤄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정경유착의 관행이 국가지도자 이명박의 리더십에 어떻게 투영되고 있느냐는 점이다. 이 후보는 “그동안 기업이 정치논리에 휘말려 경영활동이 왜곡돼 왔다”며 “경제의 뒷전에 밀려나 구태를 벗지 못한 정치를 바로세워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고 밝혀왔다. 정치 쪽에 서서 정경유착의 관행을 바로잡아 나가겠다는 다짐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경우 대략 두 가지를 상정할 수 있다. 이 후보가 정경유착을 발본색원할 적임자이거나, 아니면 큰 틀에서 결국 자신이 몸담아온 세계의 논리에 충실하거나. ■ 배신인가, 홀로서기인가 = 이명박은 91년 7월 <시사저널>과의 인터뷰에서 “정주영 회장과 내가 오래 같이 있어서 굉장한 인간관계가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일을 위해 만났기 때문에 일 때문에 헤어질 수 있는 겁니다. 재벌이란 냉정한 겁니다”라고 말해 결별을 시사했다. 당시 방영된 <한국방송> 드라마 ‘야망의 세월’은 두 사람 사이의 갈등을 증폭시켰다. 정 회장은 92년 한 잡지에 실은 회고록에서 “‘야망의 세월’이라는 드라마가 그 분을 너무 유명하게 만들었는데, 그건 정말 작가의 장난이었다. 드라마에서 보면 이명박씨가 소양강댐이다 뭐다 해서 다 한 것처럼 나오고 박 대통령 앞에 가서 으르렁으르렁 거린 걸로 나오는데 사실이 아니다”라고 적었다. 이명박이 이 드라마를 음으로 양으로 지원했던 것은 사실로 보인다. 당시 이명박에 해당하는 ‘박형섭’ 역할을 맡았던 유인촌씨는 “이 후보가 당시 말레이시아 콸라룸푸르에 출장왔다가 출장지와 상당히 떨어져있던 촬영 현장까지 찾아왔었다”고 말했다. 1992년 초 이 후보가 퇴사하자 재계에선 그가 정 회장에게 인천제철 경영권을 요구했다가 거절당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두 사람만 아는 일이라 확인되지는 않지만, 그만큼 둘 사이에 가파른 골이 패였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정 회장은 이후 노골적으로 냉담한 태도를 보였다. “이명박씨는 사실 부지런하고 판단이 좀 빨랐다. 그런 점이 인정돼 승진도 빨랐다. 사실 사람은 그렇다. 기용하는 사람이 그 사람의 재능을 알아주지 않으면 재능이란 것은 쓸모없게 되는 것이다.”(정주영 회고록, <시사저널> 92년 4월) ■ ‘건설맨’에서 ‘금융맨’으로? = 이명박은 98년 선거법 위반으로 의원직을 상실한 뒤 1년여간의 미국 생활을 마치고 2000년 귀국한다. 이 때 ‘노병의 성공신화’를 이루겠다고 선언했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재미동포 출신의 젊은 사업가 김경준씨와 ‘엘케이이(LKe)뱅크’라는 종합금융회사를 차렸지만, 김경준의 주가조작 사건으로 풍비박산이 났다. 주가조작과는 전혀 관련이 없다는 이 후보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더라도, 노회한 대기업 경영인 출신이 풋내기 사업가에게 몽땅 사기를 당할 만큼 첨단 업종에 무모하게 뛰어들었다는 비판은 피할 수 없을 듯 하다. 기업인 이명박의 성공스토리는 ‘개발시대 건설맨의 입지전’에서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했던 것이다. 6s이유주현 기자 edigna@hani.co.kr
이유주현 기자 edigna@hani.co.kr
94년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상무대(군 전투병과학교) 교외 이전 공사 비리에도 현대건설은 연루돼 있다. 1991년 현대건설은 청우와 이 공사의 공동 도급자로 낙찰됐는데, 청우는 뒤늦게 공사에 참여하면서도 이 회사 연간 도급액의 2배가 넘는 공사 지분을 받는 특혜를 받았다. 이 과정에서 청우는 군 간부들에게 뇌물을 준 사실이 밝혀졌다. 94년 국회의 국정조사에서 청우 쪽은 “현대건설이 상무대 본공사를 낙찰받은 것은 청우가 미리 빼낸 입찰예정가를 현대쪽에 알려줬기 때문”이라고 폭로했다. 같은해 말 건설부는 현대건설이 상무대 아파트를 설계와 다르게 시공하는 등 건설업법을 위반하고 하도급 통지 의무를 29차례나 위반한 것에 대해 8350만원의 과징금·과태료 부과 처분을 내렸다. 문제는 현대건설 사장 시절 알게, 모르게 이뤄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정경유착의 관행이 국가지도자 이명박의 리더십에 어떻게 투영되고 있느냐는 점이다. 이 후보는 “그동안 기업이 정치논리에 휘말려 경영활동이 왜곡돼 왔다”며 “경제의 뒷전에 밀려나 구태를 벗지 못한 정치를 바로세워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고 밝혀왔다. 정치 쪽에 서서 정경유착의 관행을 바로잡아 나가겠다는 다짐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경우 대략 두 가지를 상정할 수 있다. 이 후보가 정경유착을 발본색원할 적임자이거나, 아니면 큰 틀에서 결국 자신이 몸담아온 세계의 논리에 충실하거나. ■ 배신인가, 홀로서기인가 = 이명박은 91년 7월 <시사저널>과의 인터뷰에서 “정주영 회장과 내가 오래 같이 있어서 굉장한 인간관계가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일을 위해 만났기 때문에 일 때문에 헤어질 수 있는 겁니다. 재벌이란 냉정한 겁니다”라고 말해 결별을 시사했다. 당시 방영된 <한국방송> 드라마 ‘야망의 세월’은 두 사람 사이의 갈등을 증폭시켰다. 정 회장은 92년 한 잡지에 실은 회고록에서 “‘야망의 세월’이라는 드라마가 그 분을 너무 유명하게 만들었는데, 그건 정말 작가의 장난이었다. 드라마에서 보면 이명박씨가 소양강댐이다 뭐다 해서 다 한 것처럼 나오고 박 대통령 앞에 가서 으르렁으르렁 거린 걸로 나오는데 사실이 아니다”라고 적었다. 이명박이 이 드라마를 음으로 양으로 지원했던 것은 사실로 보인다. 당시 이명박에 해당하는 ‘박형섭’ 역할을 맡았던 유인촌씨는 “이 후보가 당시 말레이시아 콸라룸푸르에 출장왔다가 출장지와 상당히 떨어져있던 촬영 현장까지 찾아왔었다”고 말했다. 1992년 초 이 후보가 퇴사하자 재계에선 그가 정 회장에게 인천제철 경영권을 요구했다가 거절당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두 사람만 아는 일이라 확인되지는 않지만, 그만큼 둘 사이에 가파른 골이 패였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정 회장은 이후 노골적으로 냉담한 태도를 보였다. “이명박씨는 사실 부지런하고 판단이 좀 빨랐다. 그런 점이 인정돼 승진도 빨랐다. 사실 사람은 그렇다. 기용하는 사람이 그 사람의 재능을 알아주지 않으면 재능이란 것은 쓸모없게 되는 것이다.”(정주영 회고록, <시사저널> 92년 4월) ■ ‘건설맨’에서 ‘금융맨’으로? = 이명박은 98년 선거법 위반으로 의원직을 상실한 뒤 1년여간의 미국 생활을 마치고 2000년 귀국한다. 이 때 ‘노병의 성공신화’를 이루겠다고 선언했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재미동포 출신의 젊은 사업가 김경준씨와 ‘엘케이이(LKe)뱅크’라는 종합금융회사를 차렸지만, 김경준의 주가조작 사건으로 풍비박산이 났다. 주가조작과는 전혀 관련이 없다는 이 후보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더라도, 노회한 대기업 경영인 출신이 풋내기 사업가에게 몽땅 사기를 당할 만큼 첨단 업종에 무모하게 뛰어들었다는 비판은 피할 수 없을 듯 하다. 기업인 이명박의 성공스토리는 ‘개발시대 건설맨의 입지전’에서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했던 것이다. 6s이유주현 기자 edig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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