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무성 새누리당 대표, 박근혜 대통령.
[임석규의 정치빡 ⑬] 가속도 붙는 개헌론
여당이 불씨 지피고, 야당 군불로 논의 가속화
‘비박 수장’ 김무성 대표 행보가 휘발유 끼얹어 ‘개헌 블랙홀론’은 진부하긴 해도 더할 수 없이 적절한 비유다. 개헌은 일단 본격적 의제로 떠오르는 순간, 다른 논의들을 순식간에 집어삼켜 버린다. 한번 속도가 붙으면 여간해선 브레이크가 걸리지 않는다. 그만큼 폭발력이 크다. 그래서 역대 대통령들은 임기중에 개헌 논의가 불붙는 걸 두려워했다. 개헌 논의가 본궤도에 오르면 대통령의 말발도 잘 먹히지 않을뿐더러 대통령의 존재감 자체가 미약해지기 쉽다. 그러니 어느 대통령이 개헌 논의를 달가워하겠는가. 박근혜 대통령도 예외가 아니다. “다른 곳으로 국가 역량을 분산시킬 경우 또 다른 경제의 블랙홀을 유발시킬 수 있다”며 두 손 들고 여야의 개헌 논의를 막아서는 모양새다. 그런데 박 대통령이 맞닥뜨린 상황은 역대 대통령들이 마주했던 개헌 논의 국면과 많이 다르다. 개헌론을 두고 돌아가는 여야의 낌새가 과거 어느 때보다 심상치 않기 때문이다. 과거와 달리 이번엔 개헌 논의에 가속도가 붙을 여건이 두루 갖춰져 있다. 우선 대통령이 개헌 논의에 제동을 걸 수 있는 명분이 약하다. 박 대통령의 개헌 논의 저지는 대선 공약 파기에 해당한다. 박 대통령은 2012년 11월6일 “집권 후 4년 중임제와 국민의 생존권적 기본권 강화 등을 포함한 여러 과제에 대해 충분히 논의하고 국민적 공감대를 확보해 국민의 삶에 도움이 되는 개헌을 추진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정치쇄신과 관련된 대선 공약을 발표하는 공식 기자회견 자리였다. 대선 후보 시절 ‘개헌 논의’를 넘어 ‘개헌 추진’을 약속했으니 이제 와서 공약을 파기하거나 번복하려면 그럴 만한 사정을 충분히 설명하고 국민의 이해를 구해야 한다. 공약 파기에 대해선 아무런 설명도 없이 경제만을 이유로 들어 개헌을 막아선다면 논리가 궁색할 수밖에 없다. 더구나 박 대통령은 이명박 정부 출범 첫해이던 2008년엔 “개헌 논의 시작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고 말한 바 있다. 누군가 박 대통령에게 “그 땐 개헌이 경제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 개헌 논의가 빠를수록 좋다고 말했느냐”고 묻는다면 박 대통령이 어떻게 답할지 궁금하다. 둘째, 개헌 논의의 선두에 선 사람이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라는 점도 개헌 논의에 휘발유를 끼얹고 있다. 한때 ‘친박 좌장’으로 불리던 김무성은 이제 ‘비박’의 수장이 된 사람이다. 여권의 차기 대선 주자 가운데 선두 주자다. 여권의 유력한 ‘미래 권력’이 ‘현재 권력’의 반대에 굴하지 않고 개헌 논의에 불을 댕기는 상황은 전례가 없다. 시간은 미래 권력의 편이다. 더구나 ‘친박’들이 지난 전당대회에서 김무성을 낙선시키려고 안달복달했으니 김무성을 배신자라고 낙인찍기도 어렵다. 박 대통령으로선 참으로 난감한 상황이지만 뾰족한 방도가 없다. 김무성이 17일 ‘정기국회 이후 개헌 논의 봇물’ 발언에 대해 사과를 했다지만 내용을 뜯어보면 ‘대통령의 해외방문 도중’이란 발언 시점에 대한 잘못을 인정했을 뿐이다. 정기국회 이후 개헌 논의가 본격화할 것이란 전망 자체는 여전히 거둬들이지 않았다. 셋째, 야당이 매우 적극적으로 개헌 논의에 호응하며 맞장구를 치고 있다는 점도 이전과 다르다. 새정치민주연합에선 이날 아침부터 개헌 관련 발언이 봇물을 이뤘다. 김무성이 뚜껑을 연 개헌 논의가 봉쇄되지 않도록 추임새를 넣는 모양새다. 문희상 비대위원장은 언론 인터뷰에서 “(김무성의 ‘정기국회 이후 개헌 논의 봇물론’은) 생각이 나와 아주 똑같다. 정치 혁신이 잘 안 되는 만악의 근원이 제왕적 대통령제인 현행 헌법의 권력구조에 있다”며 “대통령 임기가 3년차가 되면 레임덕(권력 누수)이 생기고 새로운 대통령 후보들도 반대하기 때문에 임기 2년차의 힘 있는 대통령의 도움을 받아 밀어붙여야 한다”고 ‘개헌 골든타임론’을 거듭 피력했다. 우윤근 원내대표는 “집권 여당의 대표가 개헌 얘기를 했다가 청와대 눈치를 보고 있다. 이런 사태야말로 대한민국이 제왕적 대통령을 갖고 있으며, 이를 고쳐야 한다는 걸 드러낸 것”이라고 말했다. 박지원 비대위원도 “김무성 대표가 개헌 발언을 하자 청와대에서 발끈한 것 같다. 국회에서 개헌이 논의되는 상황을 여당 대표가 표현했는데 청와대의 지시로 여당 대표가 죄송 운운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국민의 요구인 개헌은 계속 논의돼야 한다”고 거들었다. 인재근 비대위원도 “청와대가 나서서 개헌을 막고 있다. 더 머뭇거릴 때가 아니다. 개헌은 경제를 삼키는 블랙홀이 아니라 미래로 가는 국가 동력을 재정비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넷째, 2016년 4월 20대 총선까지 전국 단위의 큰 선거가 없다는 시기적 요인이 개헌 논의가 무르익을 수 있는 토양이 되고 있다. 여야 모두 ‘개헌 골든 타임론’의 근거로 바로 이 점을 꼽고 있다. 선거가 있으면 여야의 이해가 엇갈려 개헌 논의가 탄력을 받기 어렵다. 앞으로 1년 반 남짓 선거가 없으니 개헌이 자연스럽게 논의될 수 있는 여건이 형성된 셈이다. 다섯째, 정치에 대한 불신이 어느 때보다 높다는 점도 개헌 논의를 촉발하는 요인이다. 지난 대선 이후 여야의 대결 구도가 지속되면서 정치를 이대로 놔둬선 정말 안 된다는 여론이 광범위하게 형성돼 있는 게 사실이다. 야당을 파트너로 인정하지 않고 여당의 자율성도 허락하지 않는 박 대통령의 독선적 국정 운영 또한 정치 불신을 가속화시켰다. 최근 정치의 비효율이 대통령 5년 단임제라는 제도 자체에서 기인하는 것 아니냐는 생각이 급속히 퍼지고 있다. 시민사회운동 진영에서도 정치권과 각도는 조금 다르지만 ‘1987년 체제’를 넘어서려면 결국 헌법 자체를 손대야 한다는 의견에 대체적인 공감대가 형성돼 있다. 개헌의 방향과 내용에 대해선 매우 구체적인 연구가 쌓여 있다. 국회에서도 그동안 개헌을 다룬 수많은 토론회가 열렸고, 학계에서도 활발한 논의가 이뤄졌다. 일단 개헌 논의가 본궤도에 오르기만 하면 권력구조를 비롯해 헌법의 다양한 부문에 걸친 구체적 논의가 폭발적으로 진행될 수 있다. 개헌 논의의 첫 관문은 ‘국회 개헌 특위’ 구성 여부다. 국회는 재적의원 과반이 뜻을 같이하면 개헌을 발의할 수 있다. 대통령이라도 헌법이 부여한 국회의 개헌 논의를 틀어막을 힘과 권한은 없다. 국회에서 일단 개헌 특위가 발족하면 그때부터는 개헌 논의가 공식화하면서 급속히 달아오를 가능성이 크다. 문희상 비대위원장이 17일 “올해 안에 국회에 개헌 특위가 구성돼야 한다”고 밝힌 것은 매우 의미가 있다. 여당이 불씨를 지피고 야당이 군불을 때고 있으니, 조만간 개헌 특위가 구성되지 말란 법도 없다. 임석규 기자sky@hani.co.kr ▷ ‘임석규의 정치빡’ 다른 편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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