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석규의 정치빡 ⑭]
7월14일 전당대회 승리자 김무성이 꺼낸 열쇳말은 ‘풍우동주(風雨同舟)’였다. “어떤 비바람이 몰아치더라도 우리는 한 배를 탄 공동운명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다음날 청와대 오찬에서도 “우리 모두는 ‘풍우동주’다. 대통령 잘 모시고 잘 하겠다”며 대통령 면전에서 ‘풍우동주 정신’을 거듭 강조했다. 물론 여당과 청와대가 공동운명체임을 얘기한 덕담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풍우동주’란 표현 속엔 이후 당청관계에 드리워질 짙은 먹장구름과 휘몰아칠 거센 비바람의 불길한 조짐이 함축돼 있었다.
강조는 흔히 결핍의 또 다른 표현이다. 조폭들이 그토록 의리를 앞세우는 건 조폭집단에 배신이 횡행하는 탓이다. 믿을 수 없기에 떠들썩한 피의 맹약을 맺으며 “의리! 의리!”를 외치는 거다. 정의와 거리가 먼 전두환 정권이 만든 정당이 민주정의당이었던 것도 마찬가지다. 김무성은 여당과 청와대가 위기의 순간에 딴 길을 갈 수 있다는 안팎의 우려를 씻어내고자 심사숙고 끝에 풍우동주란 사자성어를 끄집어냈을 것이다. 하지만 김무성이 풍우동주를 강조할수록 비바람이 몰아치면 여당과 청와대가 같은 배에 타기가 어렵다는 역설적 현실을 드러내고 만다. 풍우동주와 비슷한 의미를 지닌 사자성어가 ‘오월동주(吳越同舟)다. 적대적 관계지만 공통의 어려움이나 이해를 두고 부득이하게 협력하는 경우를 비유한다. 오나라와 월나라는 원수지간이었다. 김무성과 박근혜 대통령의 관계도 정치적으로는 이미 선을 넘었다는 게 정설이다. 두 사람의 풍우동주는 어디까지나 이해관계가 일치하는 선까지 한시적으로 이뤄지는 ‘적과의 동침’인 셈이다.
개헌을 둘러싼 김무성과 청와대의 신경전을 보면 풍우동주의 유효기간이 벌써 끝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정기국회 이후 개헌 논의 봇물’ 발언에 대한 김무성의 사과엔 군더더기가 없었다. ‘꼬리 내리기’란 비아냥을 감수하면서 화끈하게 자신의 잘못을 인정했다. “제가 예의가 없는 것 같아서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린다”고 한껏 머리를 조아렸다. 전당대회에서 선출된 집권당의 대표가 할 수 있는 최상급의 사과였다. 하지만 작렬하는 청와대의 뒤끝을 해소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청와대 고위 관계자가 “당 대표 되시는 분이 실수로 (개헌 관련) 언급을 했다고 하는데, 우리는 그렇게 생각을 하지 않는다”고 말한 것은 김무성을 향한 박 대통령의 불 같은 진노를 짐작게 한다. 청와대 고위 관계자의 직책과 발언 수위로 미뤄볼 때 그는 박 대통령의 뜻을 그대로 전달한 것으로 보인다.
세상에서 가장 답답할 때가 발언의 의도를 문제 삼을 경우다. 내용이나 맥락, 의미가 아니라 발언을 한 의도를 의심하고 따지기 시작하면 백약이 무효, 당해낼 재간이 없다. 속을 까뒤집어 드러내 보일 수도 없으니 그야말로 환장할 노릇인 거다. 김무성도 잔뜩 화가 난 것 같다. 머리를 숙일 만큼 숙였는데도 청와대가 개헌 발언의 의도성을 문제 삼고 나서자 “(발언한 사람이) 청와대 누군데”라며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청와대는 김무성이 치밀한 계산 아래 작심하고 개헌 발언을 했다고 단정 짓고 있다. 작심하고 한 발언인지, 아니면 얼떨결에 실수로 내뱉은 말인지는 오로지 김무성 본인만이 알 수 있다. 하지만 ‘작심 발언’이 아니라고 아무리 주장해도 그걸 입증할 방법은 없다. 김무성이 골백번 사과하고 해명해도 발언의 의도를 의심하는 청와대의 의구심을 해소할 길은 없는 거다. 청와대가 이런 식으로 나오면 김무성은 뾰족한 대응 방안이 없다. 어쩌겠는가, 부아가 치밀겠지만 그냥 입을 다물 수밖에.
독일의 정치학자 칼 슈미트는 ‘정치적인 것’의 본질을 ‘적과 동지의 구별’이라고 봤다. 청와대 쪽에서 보자면 김무성의 ‘풍우동주’는 여당과 청와대를 적과 동지로 구별하는 불길하고 불온한 비유일 수도 있다. 풍우동주를 강조함으로써 김무성은 은연중에 자신과 박 대통령을 수평관계의 동격에 놓아버렸다. 청와대가 풍우동주를 악의적으로 해석하면, 김무성이 박 대통령에게 감히 ‘맞장’을 뜨자고 덤비는 것으로 볼 수도 있는 것이다. 김무성은 아마 오월동주에 담긴 ‘적과의 동침’이란 의미를 피하려고 애써 풍우동주란 말을 찾았을 것이다. 하지만 개헌 발언을 계기로 김무성과 청와대의 관계는 오월동주로 변해버린 것 같다. 일단 같은 배에 올라타 있지만 이해가 다르고 수가 틀리면 언제든 다시 적으로 돌아서 할퀴고 싸우는 그런 사이 말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15일 청와대에서 새누리당 신임 지도부와 오찬을 하기에 앞서 김무성 대표와 악수하고 있다. 청와대 사진기자단
김무성은 전당대회에서 “할 말은 하겠다”고 외쳤다. 청와대의 일방적 지시를 충실히 따르는 거수기 여당 대표 노릇은 하지 않겠다는 얘기였다. 박 대통령은 2011년 서청원이 이끄는 친박 조직에 “의리가 없으면 인간도 아니다”라는 축하 메시지를 보낸 적이 있다. 박 대통령 입장에서 보면 김무성은 ‘친박 좌장’에서 친이계로 넘어간 ‘의리 없는’ 사람이다. 김무성의 ‘할 말’과 박 대통령이 ‘의리’는 충돌할 수밖에 없다. 김무성이 ‘할 말’을 하면 박 대통령에겐 ‘의리 없는 사람’, 그러니까 ‘인간도 아닌’ 형편없는 사람이 되고 만다. ‘수평적 당청 관계’를 기치로 내걸고 대표가 된 김무성은 ‘할 말’을 안 할 수가 없다. 대선을 꿈꾸는 김무성, 김무성을 의리 없는 사람으로 보는 박 대통령의 풍우동주는 애초부터 불가능한 얘기였는지도 모른다.
김무성 대표의 시작은 창대했다. ‘친박’의 전폭적 지원을 받은 서청원을 1만4413표 차이로 제치는 압승이었으니 기세가 등등할 만했다. 김무성은 전당대회 이튿날 언론 인터뷰에서 청와대에 쌓인 앙금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소수 중간권력자들의 권력 독점에 비분강개를 느낀다. 소수 청와대 관계자가 당내 일부하고만 소통해 박 대통령에게 잘못된 여론이 전달됐다”고 했다. 김무성이 지목한 ‘소수 중간권력자’는 김기춘 비서실장과 ‘문고리 권력’으로 불리는 ‘보좌진 3인방’을 이르는 것으로 해석됐다. 하지만 그걸로 끝이었다. 김무성은 취임 직후 내보였던 당찬 기개와 달리 청와대에 넓적 엎드렸다. 할 말도 별로 하지 못했다. 개헌 발언으로 파장이 일자 즉시 꼬리를 내리며 박 대통령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그런데도 청와대는 김무성을 ‘용서’할 기미조차 없다.
대표 취임 100일을 갓 넘긴 김무성은 이제 갈림길에 섰다. 무릎을 꿇고도 청와대로부터 공개적으로 창피를 당한 셈이니 이보다 더한 수모가 없다. 여권 주자들 가운데 지지율 1위를 달리는 김무성은 속으로 켜켜이 앙금을 쌓고 있을 것이다. 시간은 ‘미래 권력’의 편이다. 20대 총선이 다가올수록, 대통령의 임기가 지나갈수록 청와대는 구석에 몰리게 돼있다. 22일 공무원 연금개혁을 두고 김무성 대표와 친박 이완구 원내대표는 딴 목소리를 냈다. 앞으로 이런 일들이 무수히 일어날 것이다. 어쩌면 풍우동주는 풍비박산(風飛雹散)의 전주곡이었는지도 모른다. 당청관계의 파탄으로 피해를 보는 건 다름 아닌 국민이다.
임석규 기자 sky@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