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석규의 정치빡 ⑮]
정치권의 ‘반기문 쟁탈전’을 보면 데자뷰, 그러니까 언젠가 똑같은 일을 경험한 적이 있는 것 같은 기시감이 든다. 차기 대선 주자가 마땅치 않을 때 정치권 바깥의 그럴싸한 인물에게 눈독을 들이는 건 한국 정치의 변함없는 습성이다. 이렇게 해서 흠집 난 인물이 한둘이 아니다. 망가진 건 선수뿐만이 아니다. 구단 내부의 선수를 키울 생각은 안 하고 외인구단에 공들이다 ‘게도 잃고 구럭도 잃은’ 팀도 많다. 이 점에선 여야가 다를 게 없다.
새누리당 ‘친박’ 모임인 ‘국가경쟁력강화포럼’이 ‘반기문 대안론’을 제기하며 선수를 치자 새정치민주연합에선 ‘노장 그룹’이 ‘반기문 우리편론’을 들고 나왔다. 권노갑 상임고문이 3일 회고록 출판기념회에서 “반 총장과 상당히 가까운 측근들이 (반 총장이) 새정치연합 쪽에서 대통령 후보로 나왔으면 좋겠다는 의사를 나에게 타진했다”고 밝힌 데 이어 정대철 상임고문도 “당의 입장에선 당선 가능성이 높고, 집권 가능성이 높은 쪽으로 머리를 기울여야 하는 것은 당연한 논리”라고 거들었다. 박지원 의원도 “몇 개월 전부터 저도 잘 알고 권 고문도 잘 아는 반 총장과 가까운 지인들이 새정치연합에서 차기 대선 후보로 반 총장을 검토하면 어떻겠느냐는 의사를 타진해왔다. 세 곳에서 그랬는데 그게 조직적인지 아닌지는 모르겠다”고 했다.
친박 핵심들, 대선 주자 여론조사에서 반기문 빼달라
여야가 반 총장을 ‘찜’ 하려는 배경엔 차이가 있다. 여당의 친박에게 반기문은 ‘김무성 대항마’의 성격이 크다. 박근혜 대통령에겐 후계자로 내세울 만한 변변한 인물이 없다. 시간이 가면 김무성이 ‘박근혜 차별화 전략’이 가시화할 가능성이 있다. 김문수 등 여권의 다른 대선 주자들도 차별화에 가세할 것이다. 이 경우 박 대통령은 치명적 레임덕에 빠지게 된다. 친박에겐 여당의 차기 주자군에 대한 ‘견제 카드’로 활용할 인물이 절실한 상황이다. 친박들은 이런 용도에 맞춤한 인물로 반기문보다 더 좋은 카드를 찾지 못했을 것이다. 친박들은 반기문이 차기 대선 주자로 너무 일찍 불거져 견제카드로서의 효용성이 빨리 소진될 것을 우려하는 분위기다. 친박의 핵심들이 몇몇 여론조사기관에 반기문을 조사 대상에서 제외하도록 요구했다는 소문도 나돈다. 반기문을 아껴뒀다가 결정적인 상황에서 활용하려는 속셈이 읽힌다.
“어게인 1997”…‘뉴 DJP 연합’ 꿈꾸는 야당의 ‘노장 그룹’
야당 ‘노장 그룹’의 반기문에 대한 구애는 ‘어게인 호청연합!’의 성격이 강하다. 김종필을 끌어들인 ‘디제이피(DJP) 연대’로 김대중 대통령을 만들어냈던 것처럼 충청도 출신인 반기문을 영입해 다시 한번 대선을 이겨보자는 ‘뉴 DJP 연합 구상’인 셈이다. 이들은 노무현, 문재인 등 영남권 후보를 내세웠지만 영남에서 득표력에 한계를 보였다는 점도 거론한다. 일종의 ‘충청 후보 필승론’에 가깝다. ‘호남+충청 연합론’은 자연스럽게 야당에서 호남권의 영향력을 키우는 측면이 있다. 권노갑 고문 등 주로 호남권 인물들이 ‘반기문 영입론’에 앞장서고 있는 데엔 다 이유가 있다. 이런 점에서 야당 한쪽의 ‘반기문 대망론’은 솔솔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는 ‘호남권 신당론’과 연결될 가능성이 있다.
‘잠재적 대선 후보 반기문’의 정치적 상품성을 뒷받침할 수 있는 근거가 없는 건 아니다. 무엇보다 ‘신상품’이라는 점이 강점이다. 한국 정치의 ‘신상품 선호 증후군’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정치의 때가 묻지 않은 정치권 바깥의 국외자로서 일단 정치에 선을 긋고 있다는 점도 가산점이 될 것이다. 어느 진영에 치우치지 않은 듯한 ‘중도적 이미지’ 또한 반기문의 잠재력을 키우는 요인이다. 여야 양쪽에서 러브콜을 받는 상황 자체가 반기문의 중도성을 보여준다. 화려한 스펙과 성공 신화도 빼놓을 수 없다. 한국에서 누가 반기문을 능가하는 스펙을 갖고 있겠는가. 그러니 반기문이라는 이름을 여론조사에 집어넣자마자 40%에 육박하는 지지율을 기록하며 2위 박원순(13.5%)을 큰 격차로 따돌린 것은 우연이 아니다.
대선 주자로 실패한 고건, 정운찬 그리고 안철수
‘대선 주자 반기문’을 고건, 정운찬, 안철수와 비교해보는 것도 흥미롭다. 고건도 대선 2년 전인 2005년 상반기에 35% 안팎의 지지율을 기록하며 당시 여권의 지지율 1위를 달렸다. 고건은 총리와 서울시장을 역임한 화려한 스펙에 중도적 이미지를 갖췄다는 점에서 반기문과 유사하지만 호남 출신이란 점이 달랐다. 고건은 신당을 추진했지만 타이밍을 놓치며 좌고우면하다 중도 하차하고 말았다. 충청권 출신에 화려한 스펙과 중도적 이미지를 갖춘 정운찬도 한때 유력 후보로 거론됐지만 ‘꽃가마’ 태워주길 기대하며 머뭇거리느라 기회를 얻지 못했다. 여야 양쪽으로부터 구애를 받는다는 점에서 반기문은 정치 입문 이전의 안철수와도 비슷하다. 중도층, 무당파층의 지지라는 장점이 있지만 정치적 색깔이 모호하고 어느 쪽으로부터도 확실한 지지를 받지 못한다는 점은 약점이다. 고건, 정운찬, 안철수 모두 대선 후보로선 실패했다. 반기문이 이들과 다른 길을 걸을 수 있을까.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지난해 12월16일 뉴욕의 유엔본부에서 한해를 마무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반기문 본인은 일단 정치와는 선을 긋고 있다. 하지만 그럴수록 ‘그놈의 인기’는 식을 줄 모른다는 게 정치의 아이러니다. 정치권 입문 이전의 안철수도 그랬으니까. 대통령 후보로 나서달라고 여야 양쪽에서 구애하는 상황을 기분 나빠할 사람은 드물 것이다. 혹시 천운이 찾아와 대통령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 법도 하다. 그럴수록 반기문은 유엔 사무총장 임기를 마치는 2016년 말까지는 정치와 거리를 둘 가능성이 크다. 그것이 인기를 유지하는 비결임을 반기문은 고건과 안철수를 통해 터득하고 있을 것이다.
이석현 국회부의장 “벌써 외부로…부끄러운 줄 알아야”
반기문은 특히 ‘친박’들의 옹위를 받는 상황을 꺼림칙하게 생각할 수 있다. 현직 대통령은 누구나 임기가 끝나갈수록 힘이 빠지기 마련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후계자로 점 찍은 사람이란 낙인은 치명적 독이 될 수도 있는 거다. 이미 ‘친박’의 핵심 인물들 중에서도 “나는 친박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 친박이 반기문을 끌어들이려 애쓰면 애쓸수록 반기문은 더욱 손사래를 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친박들은 모르고 있다.
여야의 반기문 쟁탈전은 우리 정치의 후진성을 보여주는 자화상이기도 하다. 반기문은 ‘정치권 바깥의 새로운 인물’에 대한 대중의 허상과 일부 정파의 정치적 필요, 언론의 무책임한 보도가 결합해 창출된 인위적 후보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그렇다. 새정치연합 소속인 이석현 국회부의장은 반기문 쟁탈전을 두고 트위터에 이런 글을 올렸다. “게으른 농부가 참외 농사는 안 가꾸고 야산에 개똥참외 주우러 다니는 격이다. 여야가 가만있는 반기문씨를 입질하는데 여당에든 야당이든 (정치에) 몸담는 순간 인기는 하락한다. 자기 당에 압도적 후보가 없다고 벌써 외부로 눈길을 돌리는데,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한다.” 경청할 만한 대목이 있다.
임석규 기자sky@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