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장님 줄게 노동자 다오.” 특수고용노동자로 분류되는 건설기계 노동자들이 내세우고 있는 슬로건이다. 끊임없는 ‘비용절감’을 꿈꾸는 ‘진짜 사장님’들은 원래는 ‘노동자’였던 이들을 노동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무늬만 사장님’으로 전락시킨다. 이런 ‘갑질’ 때문에 우리 사회는 ‘노동법이 없던 시대’로 되돌아가고 있다.
대표적 특수고용직 노동자인 오토바이 택배배달원이 거리를 지나가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40대 직장맘 ㄱ씨는 사무실에서 초등학생 아이 학원 문제 때문에 오후 내내 ‘학원 강사’와 통화했다. 아이의 학원 강사는 다른 학부모의 항의 때문에 원장에게 그만둬 달라는 요구를 받았다고 했다. 5년 넘게 아이를 맡겨왔는데 이별은 한순간이었다. 며칠 전엔 학원 승합차를 운전하던 ‘기사’도 그만뒀다. 학생이 늘었지만 ‘기사’에게 돌아갈 임금은 늘지 않았기 때문이라 했다.
ㄱ씨는 저녁에 잡힌 거래처 미팅을 앞두고 자주 가는 미용실에 전화를 걸어 미뤄왔던 머리 손질을 예약했다. ㄱ씨의 담당 ‘헤어디자이너’는 쉬는 날이지만 잠깐 나와서 머리를 만져주기로 했다. “쉬는데 나오게 해드려 죄송하다”고 말한 ㄱ씨는 머리를 손질하며 배달음식 앱으로 아이와 남편이 저녁으로 먹을 치킨을 주문했다. ‘배달대행업체 배달원’이 치킨을 30분 안에 집으로 배달해줄 것이다. 그때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인터넷 설치기사’가 언제 집을 방문해야 하냐고 묻기에 주말로 약속을 잡았다.
30분 동안 머리 손질을 마친 ㄱ씨는 약속 장소로 향했다. 두시간여 미팅은 다행히 성공적이었다. ㄱ씨는 취기가 올라 대리운전 앱으로 ‘대리기사’를 호출했다. 집에 도착한 시각은 밤 10시 반. 엘리베이터에서 ‘택배기사’를 마주쳤다. “이렇게 늦은 시간까지 일하냐”고 인사를 했는데, 알고 보니 자신이 당일배송으로 주문한 책을 배달하러 온 것이었다.
가상의 ㄱ씨가 ‘서비스’를 받거나 약속한 이들 가운데 ‘노동자’는 몇명일까? 정답은 ‘0’이다. 학원강사, 학원버스기사, 헤어디자이너, 배달대행업체 배달원, 인터넷 설치기사, 택배기사, 대리기사 직종의 대부분이 ‘특수고용노동자’다. 노무를 제공한 대가로 돈을 받는 이들은 ‘노동자’가 아닌 ‘자영업자’로 분류된다. 사용자들이 ‘근로계약’이 아닌 용역·도급·위탁·위임 계약 등을 맺으면서 허울만 좋은 ‘사장님’이 부쩍 늘고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특수고용노동자라고 하면 학습지교사, 골프장 경기보조원(캐디), 레미콘 트럭 기사, 보험설계사 등이 대표적으로 꼽혔으나 이제 업종을 가리지 않고 번지고 있다. 특히 정보통신기술의 발전으로 새로운 형태의 일자리, 노동형태가 생겨나면서 ‘특수고용노동자’ 규모가 더욱 커질 것으로 보인다.
■ 서비스업에서 제조업까지 업종 가리지 않는 ‘특고’ 특수고용노동자의 노동권에 관한 문제는 1990년대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근로기준법상 ‘노동자’가 아닌 까닭에 근로시간 규제가 없고, 휴게·휴가도 보장되지 않는다. 1년 이상 근무하면 받아야 할 퇴직금도 없다. 9개 직종은 산재보험에 가입할 수 있지만, 나머지는 노동법상 누릴 수 있는 권리가 아무것도 없다. 노동자가 아닌 탓에 노동조합 결성이나 단체교섭 요구, 쟁의행위 등 노동3권도 보장받지 못한다. 근로기준법의 노동자가 아니라면 보장받을 수 있는 권리가 전무한 셈이다.
특수고용노동자는 갈수록 늘어나는 것으로 추산되지만 구체적으로 그 규모를 따지기 어렵다. 정부 공식 통계인 경제활동인구조사 부가조사를 보면 특수고용노동자 수는 지난해 49만4천명으로 2001년 78만9천명에 견줘 오히려 줄어드는 것으로 나온다. 이는 자신이 특수고용노동자인지 모르거나 자영업자 또는 노동자로 오인할 수 있는 통계조사의 한계 때문에 지나치게 적게 추산했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는다. 정부가 특수고용노동자로 파악하고 있는 대표직종 이외에도 기존엔 노동자로 근로계약을 맺다가 용역·도급·위탁·위임 계약을 맺는 직종이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국가인권위원회가 내놓은 ‘민간부문 비정규직 인권상황 실태조사-특수형태근로종사자를 중심으로’를 보면, 2014년 기준 특수고용노동자는 229만여명으로 전체 취업자 2568만여명 가운데 8.9%에 이른다.
서비스업에 집중분포돼 있던 특수고용노동자는 제조업까지 확산되는 추세다. 고용노동부가 비정규직 문제 해결을 위해 교수·전문가 등 36명으로 꾸린 ‘비정규직 서포터즈’ 활동 결과 자료를 보면, 서포터즈가 돌아본 부산·울산·경남 소재 조선·자동차·기계 등 중소제조업 사업장 2·3차 하청업체 25곳 가운데 절반이 넘는 14곳에서 1인 도급을 활용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제조업 사용자들이 직접 고용하던 노동자들을 사내하도급(소사장제)으로 돌리거나, 인력을 파견받는 것을 넘어 아예 노동자 개인과 도급계약을 맺어 제품을 생산하는 것이다. 당시 현장을 둘러본 김기승 부산대 교수는 “공장 문을 열어놓고 1인 도급자가 원하는 시간에 일을 하면서 제품에 플라스틱 커버를 씌우는 등의 작업을 맡기고 개수 단위로 도급대금을 주고 있었다”며 “이들을 위한 고용보호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사용자들은 성과달성수준 측정이 쉽고, 생산성을 높이고 물량 변화에 대응하기 쉽기 때문에 1인 도급을 활용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1인 도급자 월평균 임금은 330만여원으로 조사됐는데, 원청 직접고용 노동자 261만원보다 다소 높았지만 4대 보험이 적용되지 않고, 퇴직금이 지급되지 않는다는 것을 고려하면 결코 높은 수준은 아니다.
특수고용노동자들은 ‘4차 산업혁명’이라 불리는 정보통신의 발전에 따라 더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장소에서 업무를 하고 그에 대한 대가를 임금으로 지급받는 전통적인 근로관계의 적용을 받는 일자리는 갈수록 줄어들고 ‘일의 결과’에 따라 노무제공의 대가가 지급되는 계약형태가 늘어날 가능성이 높다. 디지털 플랫폼에서 노동력이 거래되는 ‘플랫폼 노동’ 역시 마찬가지다.
법원도 정보통신기술 발전에 따른 특수고용노동자들의 노동권에 대한 우려를 나타내기도 했다. 서울중앙지법 민사33단독 이정엽 부장판사는 지난달 14일 채권추심원의 노동자성을 인정해 퇴직금을 지급하라고 판결하면서 “사용자는 우월한 지위에서 계약 내용을 작성하고 정보통신기술을 바탕으로 계약 이행 여부를 감독한 뒤 성과가 미치지 못하면 계약을 하지 않을 수 있는 반면, 노동자로서는 재계약을 하지 않는 것이 사실상 해고와 다름없게 돼 사용자와 대등한 지위에서 계약을 맺기 어렵다”며 “전통적인 노동자에 포섭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해당 노무 공급을 위한 계약을 체결한 이를 노동자에 준해 보호할 필요성이 있다”고 밝혔다.
■ 정부가 나서 ‘위장 자영업자’ 걸러내야 전문가들은 원래 노동자였고, 현재도 노동자성을 띠고 일하는 특수고용노동자, 이른바 ‘위장 자영업자’를 다시 노동자로 돌려놓는 정부의 적극적인 행정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현재 법체계 아래서는 노동자성을 인정받아야만 사회보험 가입이나 노동권 보장이 되기 때문이다.
국제노동기구(ILO) 역시 2006년 권고를 통해 “고용관계의 원칙은 ‘사실 우선의 원칙’에 따라 이뤄져야 한다”며 “고용관계의 존재에 대한 판단은 노동의 수행, 노동자에 대한 보수의 지급과 관련된 사실에 따라 이뤄져야 하고, 사실과 상반되는 계약형태, 당사자 간 합의된 바와 상관없이 이뤄져야 한다”고 밝혔다. 한국 법원 판례도 이 기준에 따라 ‘노동자성’을 판단하고 있다. 법원은 노동자들이 근로계약이 아닌 다른 계약을 맺었다 하더라도 ‘사용자가 우월한 지위에서 계약의 종류를 결정할 수 있다’는 이유로 계약의 형식을 노동자성 판단의 기준으로 삼을 수 없다고 판결하고 있다. 법원은 최근 판례를 통해 특수고용노동자들의 ‘노동자성’을 폭넓게 인정하고 있는 추세다. 2006년 이전까지는 판단기준을 사용자의 ‘구체적·개별적 지휘·감독’이라고 규정했으나, 이후로는 ‘상당한’ 지휘감독으로 넓혔다.
권두섭(변호사) 민주노총 법률원장은 “고용노동부가 노동자성 인정 기준을 넓혀야 하는데 지금은 법원이 선도하고, 고용부는 그걸 따라갈 생각도 안 하고 있다”며 “법원보다 현장에 밀접해 있는 고용부가 근로감독을 통해 노동자성을 적극적으로 인정해줘야 한다”고 말했다.
특수고용노동자들의 노동자성을 인정받는 것이 국가 차원에서 더욱 도움이 된다는 주장도 있다. 이승욱 이화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노동법)는 “원래 노동자였던 이들이 특수고용노동자로 바뀌면 4대 보험 적용이 되지 않아 장기적으로는 4대 보험 재정에도 악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말했다.
박태우 기자
ehot@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