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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느림은 느끼면서 살아가는 것…‘굼벵이 친구’가 전해준 교훈

등록 2007-07-02 18:39

나의 자유 이야기 /

장마가 진다. 푹 익은 더위에서 벗어날 기대와 깊게 고일 빗물 피해 다닐 걱정이 교차하는 가운데 문득 재작년 이맘때를 떠올리게 된다. 여고 동창들과 평생 안주 삼을 추억을 만들고 싶어 오른 지리산이었다. 하필 빗줄기가 조금씩 발끝에 고일 무렵. 가뜩이나 급한 성격에 번번이 미끄러지는 발에 걱정이 겹쳐 마음은 점점 조급해졌다. 잔뜩 얼굴을 찌푸리고선 수전노가 동전을 긁어모으듯 한 발짝이라도 더 옮기려 안달이 나 있었다. 빨라지는 걸음에 뒤따르던 두 친구가 거듭 쉬어 가자 외쳤지만 난 발 아래 바위만을 노려보며 이를 악물 뿐이었다.

문득 뒤돌아보니 한 친구가 보이지 않았다. 행동이 워낙 굼떠 음식점에서 수저라도 놓을라치면 답답해하는 동행에게 들은 핀잔을 반찬 삼는다던 녀석이었다. 다른 친구에게 그 녀석의 행방을 물었다. 친구는 목에 맸던 손수건으로 땀을 훔치며 저 아래를 가리켰다. 저만치 그 친구의 모습이 보였다. 상경한 시골처녀마냥 두리번거리며 뭔가를 손에 들고 장난까지 치는 모양새를 보니 화가 치밀어 올랐다. 한마디 할 생각으로 허리에 손을 짚고 노려보길 한참. 산책하듯 걸음을 옮기던 그 친구가 지척에 이르렀는데도 내 입은 제 할 일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손바닥에 고운 꽃잎을 하나 얹은 채 생글생글 웃던 친구 왈. “야, 산 정말 좋다. 처음 보는 꽃들이 지천이야. 나무 흔들리는 소리 들었어? 서울에선 꿈도 못 꿀 텐데 횡재한다.” 한바탕 소란이 일 거라 생각했던 또 다른 친구는 의아한 듯 나와 그 친구를 번갈아 보고 있었다. 땀을 비 오듯 흘리며 산을 오르는 내내 ‘얼른 해치우자’는 생각만이 날 지배하고 있었다.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 여기며 서둘러 옮기던 걸음에 어디 주위를 둘러볼 여유가 있었을까. 그 친구가 내미는 꽃잎을 받아들곤 말없이 주위를 둘러봤다. 꺼져 있던 스피커의 전원을 켠 것처럼 새소리가, 나뭇가지를 스치는 바람소리가 귓가에 스며들었다. 부술 듯 밟아대던 바위엔 앞서 이 길을 지났을 많은 이들의 이야기가 적혀 있었다. 졸졸졸 흐르는 계곡도 나 좀 봐달라는 듯 수줍게 피어 있는 꽃들도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그날 밤, 안개 자욱한 지리산 산장에서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자리를 펴고 짐을 정리하는 그 친구의 손은 여전히 더뎠지만 그마저 답답함이 아닌 여유로움으로 느껴지던 순간. 피에르 상소가 귓가에 속삭였다. 느림은 살아가면서 겪는 모든 나이와 계절을 아주 천천히, 경건하게 그리고 주의깊게 느끼면서 살아가는 것이라고.

이윤경/대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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