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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교육

지팡이의 다른쪽 끝을 집어 올리다

등록 2006-06-18 18:24수정 2006-06-21 17:45

창세기에 나오는 바벨탑 이야기는 전형적인 ‘기반 위주’의 세계관을 반영한다. 노아의 후손들이 하늘에 닿기위해서는,오히려 땅이라는 기반을 버리는 ‘비기반적 사고’를 가졌어야 했다. 쿤은<과학혁명의 구조>에서 기반을 애지중지하는 세계관에 일격을 가했다. 루카스 폰 팔켄보르크 <바벨탑의 건축><쿠어팔츠박물관 소장>
창세기에 나오는 바벨탑 이야기는 전형적인 ‘기반 위주’의 세계관을 반영한다. 노아의 후손들이 하늘에 닿기위해서는,오히려 땅이라는 기반을 버리는 ‘비기반적 사고’를 가졌어야 했다. 쿤은<과학혁명의 구조>에서 기반을 애지중지하는 세계관에 일격을 가했다. 루카스 폰 팔켄보르크 <바벨탑의 건축><쿠어팔츠박물관 소장>
“과학의 변화 또는 발전은 지식의 축적·누적적 성과가 아니라
비연속적 또는 ‘혁명적’ 결과다. 기반 위주의 사고를 버려야
변화하고 발전할수 있다”
김용석의 고전으로 철학하기/토머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

토머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1962년)는 ‘패러다임’(paradigm)이라는 말과 뗄 수 없다. 지금은 일상 용어처럼 사용하는 이 말을 유행시킨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이 책은 과학계뿐만 아니라 보통 사람들의 의식에도 크게 영향을 미쳤다. 패러다임이라는 말은 물론 쿤이 만든 것은 아니다. 이 말은 고대 그리스어 ‘파라데이그마’에서 유래하는데, 플라톤 철학에서 핵심적 술어이며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에도 나온다. 현대어에서는 언어 학습의 ‘표준예’라는 뜻으로 사용됐고, 쿤은 여기서 이 말과 그 개념을 따왔다.

<과학혁명의 구조>가 제시하는 입장은 잘 알려져 있다. 그 핵심은 과학의 변화 또는 발전이 지식의 ‘축적적’ 또는 누적적 성과가 아니라 비연속적 또는 ‘혁명적’ 결과라는 것이다. 쿤에 의하면 “과학혁명이란 하나의 옛 패러다임이 이와 양립할 수 없는 새로운 패러다임에 의해서 전반적 또는 부분적으로 대체되는 비축적적인 변화의 에피소드들을” 의미한다.

사실 이와 유사한 생각은 쿤 이전에도 있었다. 특히 20세기 초 양자역학의 등장과 함께 고전물리학의 사고 체계가 흔들리면서 과학적 지식이 비축적적이라는 사고의 단초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하이젠베르크는 “과학의 진보는 반드시 누적적이라고 말할 수 없다. 어떤 새로운 현상은, 그것을 위해 짜 맞추어진 새로운 개념에 의해서만 이해될 수 있다.”고 주장한 바 있다.

우리가 여기서 관심을 갖는 것은 이런 사고의 전환이 가져온 문명사적 변화와 철학적 의미이다. 쿤의 사상을 대표하는 말들은 언급했듯이 패러다임, 축적적, 정상과학, 과학혁명 등이다. 그러나 철학적 입장에서 본 이 책의 핵심 개념은 ‘기반’(fundamental)이다. 흔히 쿤의 사상을 해석할 때, ‘축적적’인 것과 ‘혁명적’인 것을 대립 개념으로 놓는다. 하지만 이들이 모두 ‘기반’이란 개념에 의존한다는 것은 간과한다.

무엇인가 축적하기 위해서는 기반이 필요하다. 쉽게 말해, 어떤 바탕 위에서 뭔가를 쌓을 수 있는 것이다. 축적적 사고에 메어 있는 사람은 반드시 기반 위에서 뭔가 하려 한다. 곧 ‘기반 중심’의 세계관을 갖고 있다. 예를 들어, ‘창세기’에 나오는 바벨탑의 이야기는 전형적인 ‘기반 위주’의 세계관을 반영한다. 노아의 후손들은 하늘에 닿기 위해서 땅이라는 기반 위에 탑을 높게 쌓아감으로써, 그 오만 때문에 신으로부터 벌을 받았다. 그러나 달리 보면 당시 사람들은 그 무지함 때문에라도 벌을 받았어야 했다. 땅과 전혀 다른 차원에 있는 하늘에 닿기 위해 땅이라는 ‘기반’에서 모든 것을 시작하려는 무지함 말이다. 오히려 하늘에 조금이라도 가깝게 가려했다면 땅이라는 기반을 버렸어야 했다. 즉 날아야 했다. ‘비기반적 사고’를 가졌어야 했다.

이제 혁명과 기반의 관계를 보자. 혁명은 기반을 무너뜨리고 다시 세운다는 뜻이다. 이런 의미에서 쿤도, 패러다임 변화는 “기존 패러다임의 명료화나 확장으로 성취되는 과정 즉 축적적 과정과는 거리가 멀고” 기존 패러다임의 “방법과 응용은 물론 가장 기본적인 이론적 일반화조차도 변화시키는 재건 사업”이라고 했다. 이런 변화는 “지팡이의 다른 쪽 끝을 집어 올리는 것”과 같다. ‘지지 기반’을 확 바꾸는 것이다. 쿤의 이론은, 그가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기반을 애지중지 하는 세계관에 일격을 가한 것이다.

흔히들 쿤의 이론이 자연과학 이외의 분야에서 더욱 열광적으로 받아들여졌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당연한 일이다. 문화, 사회, 정치 분야의 역사가 패러다임적 변화 과정을 겪는다는 데서 오히려 쿤이 과학 발전을 설명할 수 있는 영감을 얻었기 때문이다. 자연과학 외의 분야에서 그 이론에 크게 호응한 것은, 쿤이 빌려온 연장을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었을 때 원주인이 연장의 쓰임을 새삼 발견하고 좋아한 격이다.

그렇다면 쿤의 이론을 정치에 한번 적용해보자. 흔히 정치인이 성공하려면 지지 기반이 중요하다고 한다. 하지만 지지 기반을 중시하는 정치인은 변화를 이끌어내기 힘들다. 지지 기반에 메어 있는 정치인은 획기적일 수 없다. 영웅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쿤의 이론을 현실에 적용해서 우리가 얻는 깨달음은, 기반 위주의 사고와 세계관을 버려야 변화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영산대 교수 anemos@ys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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