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범 와이즈멘토 이사, 곰TV 과학 강사
이범의 거꾸로 공부법 /
미국의 대형서점에 가 보면 수능(SAT) 문제집이 몇 종류 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문제집을 많이 풀지 않아도 고득점이 가능하다. 우리나라 입시도 마찬가지다. 나는 고3 시절에 국사와 세계사는 아예 문제집이 없었고, 국어는 문제집을 단 한권 풀었을 뿐이다. 하지만 현재 우리나라 서점을 보면 무수히 많은 문제집들이 시중에 나와있고, 학생이나 학부모나 모두 ‘문제집 푸는 것이 곧 공부’라고 여긴다. 이러한 풍조는 학원에 의해 특히 강화된다. 학원은 끊임없이 외형적인 성과를 보여줌으로써 학부모에게 ‘학원에 보낸 보람’을 느끼게 해야 하는데, 그 외형적인 성과의 한 축은 ‘성적’이고 또다른 축은 ‘풀어낸 문제의 분량’인 것이다. 성적은 학부모에게 만족감을 주고, 문제집은 학부모에게 가시적인 안도감을 준다. 예를 들어 ‘우리 아이가 겨울방학 동안 문제집을 두 권 풀었으니 학원에 보낸 보람이 있구나’ 하는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지나치게 문제풀이에 의존하는 공부에 익숙해진 학생은, 정작 고3이 되었을 때 효율적으로 입시에 대비하기 어렵다. 일단 문제집 풀이식 공부는 논술에 관해서는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리고 단기적인 내신 시험 대비에는 어느정도 효과가 있을지 몰라도, 수능 대비에는 효과가 떨어진다. 수능은 장기적인 시간투자와 폭넓은 응용능력, 그리고 꼼꼼한 완성도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문제를 풀더라도 개념을 충분히 이해하고 나서 적당량의 문제를 풀어야 하는데, 많은 학생들이 개념이 약한 상태에서 무조건 문제집을 풀어제낀다. 이렇게 되면 해당 문제집에서 다뤄진 내용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커버가 될지 몰라도, 그 문제집에서 다뤄지지 않는 내용에는 허점이 생기게 된다. 큰 고기는 잡을 수 있을지 몰라도 작은 고기는 놓치게 되는 것이다. 당연히 어중간한 점수는 받을 수 있겠지만 고득점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개념이란 무엇인가? 개념은 ‘정의’(definition)가 아니다. 예를 들어 ‘공룡’에 대한 사전적 정의는 ‘중생대에 번성한 파충류 화석동물’이다. 그러나 이걸 알고있다고 해서 공룡이라는 개념을 이해한 것이 아니다. 개념은 인접한 다른 개념들의 네트워크를 통해서만 잡히는 것이다. 적어도 척추동물을 이루는 어류, 양서류, 파충류, 조류, 포유류의 진화과정에 대해서 이해하고, 중생대를 전후로 하는 고생대와 신생대를 알고있어야 공룡에 대한 ‘개념’이 형성되는 것이다. 여기에 더하여 공룡을 멸종시킨 소행성 충돌이나 공룡이 온혈동물이냐는 논쟁 등을 접한다면 금상첨화이다.
이런 식으로 개념(의 네트워크)을 잡아나가면 확장능력과 응용능력은 저절로 생기게 된다. 이 뿐만이 아니다. 몇 년 전에 발표된 유명한 연구결과에 따르면, 특정한 개념의 핵심(사전적 정의)만을 공부한 집단에 비해 그 개념을 둘러싼 주변적인 지식을 함께 접한 집단이 훨씬 오랫동안 그 개념을 정확히 기억한다. 진정한 개념은 힘이 세고, 장기 기억 속에 확고하게 자리잡는 것이다.
이범/와이즈멘토 이사, EBS·곰TV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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