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현숙의 학부모코칭
이십여년 전 일이다. 한 운동단체에 유능하고 헌신적이며 에너지가 넘치는 리더가 있었다. 주도적인 태도와 대의를 위해 기꺼이 희생하는 그의 행동은 빛났다. 그런데 얼마 전 듣게 된 근황은 조금 놀라웠다. 그는 여전히 조직에서 뛰고 있었지만, 사람들은 그를 슬슬 피하는 중이었다. 그는 ‘나는 이렇게 죽을 둥 살 둥 하고 있는데, 다들 너무 편하게, 적당히 산다’ 고 생각하고 있었다. 불만이 가득 서린 그 태도의 밑바닥에는 ‘나만 바보같이 손해보고 있다’는 피해의식이 자리잡고 있다. 독기를 뿜어내듯이 쏟아내는 불평을 계속 받아주기란 가까운 이들에게도 정말 어려운 일이다.
피해의식이 무서운 이유는 이것이 종종 폭력이나 공격적인 태도를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쓰이기 때문이다. 피해의식은 자신을 망치고 관계를 망친다. 회사의 희생자들은 속으로 이렇게 말한다. “난 정말 열심히 회사를 위해 일하고 있다고요. 사생활이 없을 정도로요.” “저 친구는 나에 비하면 별거 아닌데 왜 대단하게 대접받지?”
거리에서 “회사에 청춘을 바쳤는데…. 그 희생의 대가가 이것입니까?”라고 묻는 유인물을 보면 가슴이 아프다. 그들의 처지도 가슴 아프지만, 어쩔 수 없는 피해의식이 보여서다. 한 회사에 오래 다닌 것도 하나의 선택이었던 게 아닐까. 회사를 위해 ‘젊음을 바쳐 희생했다’가 아니라 ‘성장하도록 크게 기여했다’고 쓰면 더 좋겠다. 그것이 훨씬 더 건강하고 당당한 태도이며, 또한 사실일 테니까.
부모들은 어떤가. 자식을 위해 희생했다고 느낄수록 자식에게 바라는 것이 끝이 없다. 조금만 서운해도 억울함이 가슴을 친다. ‘내가 저를 어떻게 키웠는데!’ 이렇게 느끼는데 객관적 기준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나는 이런 피해의식을 ‘희생자 마음’(Victim mind)이라고 이름 붙였다.
가끔은 내게도 희생자 마음이 올라온다. 일하는 엄마로서, 경영자로서, 코치로서, 역량에 비해 벅찬 여러 일을 하다 보면 어느 날, 늦은 퇴근길에 희생자 마음이 쑤욱 나를 휘감는 것이다. ‘억울하다, 억울해. 남편한테 억울하고, 아이들을 알뜰하게 거두는 친구를 생각하니 억울한 마음이 들고, 직원들에게도 억울하네. 그리고 또….’
처음에는 짜증을 내곤 했는데 이제는 ‘희생자 마음이 올라오는구나’ 하고 느낀다. 늦게까지 남아 일하는 걸 선택한 것은 나 자신이잖아. 내가 좋아서 받아들인 것인데 마치 누가 시켜서 어쩔 수 없이 하는 것처럼 생각한 것이다. 자식을 위해 희생했다고 느끼는 것과, 자녀 양육이 나에게 소중한 가치이기 때문에 거기에 많은 것을 쏟았다고 느끼는 것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희생자 마음의 반대말은 ‘주도적인 마음’인 것 같다. 내가 선택할 수 있다는 것, 나는 조수석에 앉아 불평하는 사람이 아니라 인생의 운전석에 앉아 핸들을 잡은 사람이다.
한국코칭센터 대표 helen@ekl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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