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철호의 교실 밖 국어여행
우리말 논술
김철호의 교실 밖 국어여행 / [난이도 수준-중2~고1]
38. ‘쉼표’에 대하여
39. 말을 갖고 놀자 ①
40. 말을 갖고 놀자 ② 내가 학교 다닐 적에 내 친구들이 대부분 그랬듯이, 혹시 여러분도 국어를 재미없는 과목으로 생각하고 있는 쪽은 아닌가? 만일 그렇다면, 국어가 재미있어지는 방법을 하나 일러주겠다. 이제는 케케묵은 것이 되어버렸지만, 한때 유행했던 이런 농담이 있다: “오락실에 용이 두 마리 살고 있다. 그 용들의 이름은? 일인용과 이인용.” 한자로는 다르지만 한글로 쓰면 똑같은 두 글자를 이용한 말장난이었다. 또 이런 말장난도 있었다: “나는 토끼띠. 용팔이는? 난 파란 띠. 땡칠이는? 난 허리띠. 만득이는? 난 뫼비우스의 띠!” 앞의 예와 비슷한, 동음이의어(소리는 같지만 뜻이 다른 말)를 이용한 말놀이다. 내가 창작한(?) 것으로는 이런 것도 있다: 요즘 학교에 가면 분리수거를 위해 쓰레기통을 ‘일반’ 쓰레기와 재활용 쓰레기로 구분해놓고 있는데, 그렇다면 2반이나 3반 애들은 재활용이 안 되는 쓰레기를 어디다 버리라는 말인가? 요즘 텔레비전에 나오는 개그맨들이 주로 써먹는 이런 ‘유치한’ 말장난들은 사실 누구나 해봄직한 일이다. 말장난은 언어의식을 높여주기 때문이다. 말장난이 어떻게 언어의식을 높여준다는 말일까?
‘엄마’라는 말은 사실 엄마가 아니다. 단지 실제 엄마를 가리키는 기호일 뿐이다. 이런 점에서, 말은 실체가 아니다. 다만 실체를 지칭하기 위한 도구일 뿐이다. 말이 가리키는 실체를 ‘의미’라고 하면, 언어는 의미의 세계에 딸려 있는 허깨비 같은 존재다. 그래서 우리는 ‘엄마’ 하면 곧바로 실제의 엄마를 떠올린다. ‘엄마’라는 말이 내뱉어지는 순간, 말 자체는 사라지고 그 말이 가리키는 대상, 즉 엄마라는 존재가 우리의 머릿속을 차지해 버리는 것이다. 말장난은 말을 사라지지 않게 함으로써 성립한다. 앞에 소개한 말장난에서, ‘토끼띠’라고 했을 때 통상적으로 떠올리는 십이간지의 이미지로 곧장 넘어가지 않고 이 말을 ‘토끼’와 ‘띠’로 나눈 다음 그것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것이다. 그래야 ‘띠’가 가리킬 수 있는 또 다른 대상, 즉 허리에 매는 띠나 수학에 나오는 뫼비우스의 띠 같은 것들을 떠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평소에 공기의 존재를 의식하지 못한다. 한순간도 쉬지 않고 공기를 호흡하고 있으면서도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왜? 말 그대로 ‘한순간도 쉬지 않고’ 반복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걸음을 계속 걷다 보면 어느새 자신이 걷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무감각해지는 것과 마찬가지다. 우리에게 한국어는 공기 같은 존재다. 나의 생각을 자동으로 말하고 남의 말을 자동으로 이해하면서도 정작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기억도 나지 않는 과거 어느 땐가부터 저도 모르게 말을 몸에 익힌 결과, 자기 말을 내뱉고 남의 말을 이해하는 과정이 어느덧 무의식적인 일이 된 것이다. 말놀이는 이렇게 자동화되고 무의식화된 과정을 자각적이고 의식적인 과정으로 만드는 첫걸음이다. 그러면 말이 의미의 세계에서 떨어져 나와, 말 자체만을 볼 수 있게 된다. 이렇게 말이 말 자체로 보이게 되면, 전에는 미처 깨닫지 못했던 ‘드넓은 말의 세계’가 눈앞에 펼쳐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언어의식이 높아진다는 것은 바로 이런 의미다. 김철호 <국어실력이 밥 먹여준다> 저자
39. 말을 갖고 놀자 ①
40. 말을 갖고 놀자 ② 내가 학교 다닐 적에 내 친구들이 대부분 그랬듯이, 혹시 여러분도 국어를 재미없는 과목으로 생각하고 있는 쪽은 아닌가? 만일 그렇다면, 국어가 재미있어지는 방법을 하나 일러주겠다. 이제는 케케묵은 것이 되어버렸지만, 한때 유행했던 이런 농담이 있다: “오락실에 용이 두 마리 살고 있다. 그 용들의 이름은? 일인용과 이인용.” 한자로는 다르지만 한글로 쓰면 똑같은 두 글자를 이용한 말장난이었다. 또 이런 말장난도 있었다: “나는 토끼띠. 용팔이는? 난 파란 띠. 땡칠이는? 난 허리띠. 만득이는? 난 뫼비우스의 띠!” 앞의 예와 비슷한, 동음이의어(소리는 같지만 뜻이 다른 말)를 이용한 말놀이다. 내가 창작한(?) 것으로는 이런 것도 있다: 요즘 학교에 가면 분리수거를 위해 쓰레기통을 ‘일반’ 쓰레기와 재활용 쓰레기로 구분해놓고 있는데, 그렇다면 2반이나 3반 애들은 재활용이 안 되는 쓰레기를 어디다 버리라는 말인가? 요즘 텔레비전에 나오는 개그맨들이 주로 써먹는 이런 ‘유치한’ 말장난들은 사실 누구나 해봄직한 일이다. 말장난은 언어의식을 높여주기 때문이다. 말장난이 어떻게 언어의식을 높여준다는 말일까?
‘엄마’라는 말은 사실 엄마가 아니다. 단지 실제 엄마를 가리키는 기호일 뿐이다. 이런 점에서, 말은 실체가 아니다. 다만 실체를 지칭하기 위한 도구일 뿐이다. 말이 가리키는 실체를 ‘의미’라고 하면, 언어는 의미의 세계에 딸려 있는 허깨비 같은 존재다. 그래서 우리는 ‘엄마’ 하면 곧바로 실제의 엄마를 떠올린다. ‘엄마’라는 말이 내뱉어지는 순간, 말 자체는 사라지고 그 말이 가리키는 대상, 즉 엄마라는 존재가 우리의 머릿속을 차지해 버리는 것이다. 말장난은 말을 사라지지 않게 함으로써 성립한다. 앞에 소개한 말장난에서, ‘토끼띠’라고 했을 때 통상적으로 떠올리는 십이간지의 이미지로 곧장 넘어가지 않고 이 말을 ‘토끼’와 ‘띠’로 나눈 다음 그것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것이다. 그래야 ‘띠’가 가리킬 수 있는 또 다른 대상, 즉 허리에 매는 띠나 수학에 나오는 뫼비우스의 띠 같은 것들을 떠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평소에 공기의 존재를 의식하지 못한다. 한순간도 쉬지 않고 공기를 호흡하고 있으면서도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왜? 말 그대로 ‘한순간도 쉬지 않고’ 반복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걸음을 계속 걷다 보면 어느새 자신이 걷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무감각해지는 것과 마찬가지다. 우리에게 한국어는 공기 같은 존재다. 나의 생각을 자동으로 말하고 남의 말을 자동으로 이해하면서도 정작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기억도 나지 않는 과거 어느 땐가부터 저도 모르게 말을 몸에 익힌 결과, 자기 말을 내뱉고 남의 말을 이해하는 과정이 어느덧 무의식적인 일이 된 것이다. 말놀이는 이렇게 자동화되고 무의식화된 과정을 자각적이고 의식적인 과정으로 만드는 첫걸음이다. 그러면 말이 의미의 세계에서 떨어져 나와, 말 자체만을 볼 수 있게 된다. 이렇게 말이 말 자체로 보이게 되면, 전에는 미처 깨닫지 못했던 ‘드넓은 말의 세계’가 눈앞에 펼쳐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언어의식이 높아진다는 것은 바로 이런 의미다. 김철호 <국어실력이 밥 먹여준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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