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이 바로 자신의 곁에 있는데도 그 가치를 알지 못하는 경우를 파랑새 증후군이라고 한다. 이 용어는 마테를링크의 동화극 <파랑새>에서 따온 말이다. 바로 자기 곁에 파랑새가 있는데도 헛된 꿈을 찾아다니는 ‘찌르찌르’와 ‘미찌르’처럼 우리도 그런 삶을 살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 본다.
최근 미국에서 경쟁력 없는 학교 5000여개를 없앤다는 보도가 있었다. 그 소식에 많은 사람들은 ‘그래 학교는 경쟁력이 있어야지’ 하고 생각한다. 우리도 학교 없애기 경쟁에 몰두한다. 그러나 그것은 미국 이야기다. 이제 교육도 진정성을 가지고 우리의 길을 찾았으면 한다. 나는 우리 교육에서 녹색혁명이 가능하다고 본다.
그런데 안타까운 일이 지금도 일어나고 있다. 간편한 잣대로 소위 부실한 지방 사립대학을 없앤다고 하고, 세금이 많이 든다고 국립대학을 통폐합하거나 법인화한다고 말한다. 초·중·고교 역시 평가를 통해서 시골 학교나 분교를 통폐합한다고 한다. 이런 식으로 시골 주민들과 아이들에게 어떤 경쟁력을 길러주겠다는 것인가? 대도시에서 수많은 문화적 혜택에 세금 쓰는 것이 아깝지 않듯이, 소도시나 시골의 학교에 쓰는 세금도 아깝지 않다.
많은 사람들은 말할 수 있다. 왜 학생도 없는 촌구석의 대학, 초·중·고교를 남겨둬야 하느냐고. 그것은 그 지역에 살아보면 안다. 왜 있느냐는 말은 뜨내기들이 부질없이 주판알을 튕기는 소리일 뿐 현실은 아니다. 봄의 교정에서 뛰어노는 5~6명의 학생이 재잘거리는 소리보다는 분교를 폐교하고 수련원을 지어서 휴일에만 수백 명이 오게 하는 것이 지역사회에 경제적으로는 더 이익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지역사회와의 소통 없는 이벤트다. 지역이 살기 위해서 녹색혁명을 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라면 그러한 경제적 이익은 그리 오래가지 못한다는 것을 알 것이다.
조그만 도시, 읍·면·동·리에 있는 학교는 그 지역의 찬란한 문화의 보고이다. 학교에서 아이들이 뛰어놀고 학교 운동장에 사람들이 모이는 것을 보면 그 자체가 살아 있는 시골의 진풍경 그 자체다. 아무리 외진 시골에도 학교는 있다. 경제적인 이익을 얻을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고집스럽게 학교가 꾸려지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이게 바로 녹색혁명이다.
도로나 철도가 나라의 혈관이듯이 작은 도시나 시골의 학교는 지역의 혈관이나 마찬가지다. 학교는 바로 문화 혜택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의 숨통을 열게 하는 녹색혁명의 보고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도시의 공공도로나 철도를 운영상 적자를 이유로 폐쇄할 수 없듯이 시골 학교도 그래선 안 된다.
학교를 최대한 살뜰하게 만들려는 자세는 자기 곁에 있는 파랑새를 알아보는 일이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녹색혁명은 바로 유에서 유를 만드는 녹색혁명보다 비용이 더 많이 들어간다. 없는 자전거도로를 만들겠다며 촌구석에 현수막을 붙이고 행사를 하는 예산으로 살아 숨쉬고 있는 학교에 대한 지원을 늘리는 게 정부가 원하는 녹색혁명의 취지에도 맞지 않을까 싶다. 박찬석/학부모, 서울 강동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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