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광복 교사의 인문학 올드 앤 뉴
안광복 교사의 인문학 올드 앤 뉴 / [난이도 수준-고2~고3] 3. 강철군화와 올리브나무
-우리에게는 너무나 꿈같은 자유주의 4. 늘어진 인생 진도표
-인생을 계획있게 가꾸는 길 5. 프로파간다, 환상과 허상의 경계선
〈길어진 인생을 사는 기술〉〈노년에 관하여〉
슈테판 볼만 지음, 유영미 옮김. 웅진지식하우스 <노년에 관하여>
키케로 지음, 오흥식 옮김. 궁리 원래 인류에게 사춘기란 없었다. 아이는 곧장 어른이 되었다. 일손이 달렸기에 앞가림만 할 줄 알면 바로 ‘일꾼’ 대접을 받았다. 결혼도 빨랐다. 예순만 넘겨도 장수했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였으니, 자식을 돌보는 기간도 넉넉하지 못했다. 하루빨리 후손을 남겨 어른으로 키워내야 했다. 사춘기는 평균 수명이 늘어나고 노동력도 덩달아 많아지면서 생겼다. 어른이 많아져서 어린아이까지 일에 뛰어들지 않아도 되었던 까닭이다. 몸은 성인만큼 영글었지만 특별한 의무는 주어지지 않는 상태, 사춘기는 이렇게 만들어졌다. 사춘기와 사추기는 여러모로 닮았다. 몸의 호르몬 분비가 달라지면서 감정이 하늘과 땅을 오간다. 갱년기에 접어든 사십대들의 마음은 십대만큼이나 불안하다. 자신의 위치가 어설프다는 점에서도 둘은 비슷하다. 십대에게는 숱한 기대와 바람이 쏟아지지만 정작 자기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려줄 뚜렷한 역할이 없다. 직장에서는 내몰리고 가정에서의 권위도 춤을 추지만, 자신이 어느 길로 가야 하는지에 대한 답은 보이지 않는다. 옛사람들에게는 분명한 ‘인생 진도표’가 있었다. 공자는 일찍이 서른에는 뜻을 세우고(이립·而立), 마흔에는 흔들리지 않으며(불혹·不惑), 오십에 이르러서는 하늘의 뜻을 안다(지천명·知天命)는 ‘성취 목표’를 세워주었다. 그러나 지금의 나이 사십은 ‘불혹’이 아니라 ‘유혹’과 ‘의혹’으로 다가온다. 그럼에도 사회는 어긋난 인생 진도표를 밀어붙인다. 청년 같은 중년들은 ‘정년’이라는 명목으로 직장에서 밀려난다. 대학생들은 이십대 중반이면 학교를 떠나야 한다. 늘어난 인생만큼 청소년기는 서른 살 초반까지 연장되었는데도 말이다. 취업 준비 등으로 미적거리는 서른 무렵 젊은이들은 우리에게 더 이상 낯설지 않다. 그렇다면 늘어난 수명만큼 인생 진도표를 다시 써야 하지 않을까? 슈테판 볼만의 <길어진 인생을 사는 기술>은 우리에게 새롭게 바뀐 진도표를 내놓는다. 볼만은 건강한 장년들을 보며 이렇게 선언한다. “노년은 마침내 예전에 끔찍함을 잃어버렸다.” 나이 육십은 이제 노인 축에도 못 든다. 괴테도 예순 이후의 삶을 ‘제3의 청춘’이라고 불렀다. 실제로 괴테는 예순에서 여든 살에 이르는 기간 왕성하게 작품 활동을 했다. 노년은 책임과 사회적 의무에서 벗어나 자기가 가장 잘하는 일에 매달릴 수 있는 시기이다. 노년이 살 만한 시기로 바뀌었다면, 우리 인생이 꼭 교육, 직업, 은퇴 순으로 흐를 필요가 없다. 슈테판 볼만은 이를 대신할 진도표로 ‘이브 문화’를 제시한다. 새로운 인생은 교육, 직장 갖기, 가족과 육아, 두 번째 직업 활동, 가족을 돌보며 새로운 직장 준비하기, 세 번째 직업 활동기로 이어진다. 늘어난 인생은 여성들의 사회 활동을 자유롭게 한다. 남성들도 그 혜택을 누리기는 마찬가지다. 홀로 짊어지던 생계의 부담을 나누어 지는 까닭이다. 하지만 의문이 남는다. 중장년, 노인들이 젊은이들만큼 빠르고 효율적으로 일할 수 있을까? 나이 든 이들의 체력을 이십대에 견주기는 무리다. 슈테판 볼만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피아니스트 루빈스타인을 끌어들인다. 루빈스타인은 여든 살 이후에도 계속 연습을 했다. 그는 여전히 뛰어난 피아노 연주자였지만, 젊은 피아니스트들과는 여러모로 달랐다. 그는 먼저 연주곡목부터 줄였다. 자신이 가장 잘 연주하는 곡들만으로 레퍼토리를 추렸다. 그러곤 전보다 더 연습했다. 마지막으로 빠르게 쳐야 하는 부분이 있으면 그 앞부분을 더 천천히 연주했다. 덕분에 청중들은 루빈스타인의 연주 속도가 느려졌음을 깨닫지 못했다. 떨어지는 체력을 순발력과 원숙함으로 메운 셈이다. “대개 위대한 국가들은 젊은이들 때문에 무너지고, 노인들에 의해 회복된다.” 로마시대 위대한 정치가였던 키케로의 말이다. 그의 <노년에 대하여>에서도 늘어난 인생에 대한 가르침을 들을 수 있다. 노년에 이르면 분명 체력은 떨어진다. 그러나 자연은 인생의 단계마다 어울리는 특징을 안겨주었다. 청년에게는 격렬함이, 중년에게는 장중함이, 노년에게는 원숙함이 어울린다. 영혼은 나이가 들어도 갈고닦으면 더욱 훌륭해진다. 사회가 원로들의 말에 귀 기울이는 까닭이다. 뿐만 아니라, 노년에 이르면 유혹으로부터도 자유로워진다. 그리스 시대 시인 소포클레스는 ‘나이 들어 성욕을 느끼지 못해 아쉽지 않은가’ 하는 질문을 받았다. 시인은 펄쩍 뛰며 답한다. “무슨 끔직한 말을! 나는 잔인하고 사나운 주인에게서 지금 막 빠져나온 듯하다네!” 먼 자리에 앉아서도 무대가 보이듯, 나이 들어서도 쾌락이 무엇인지는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세월이 피를 식혀버렸기에 쾌락은 이미 유혹이 되지 못한다.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일을 처리하기에는 젊은 시절보다 노년기가 더 낫다고 할 만하다. 청년실업이 매우 심각한 요즘이다. 출산율 저하도 국가를 뒤흔드는 위기로 떠오르고 있다. 하지만 해법을 찾으려면 문제의 반대쪽도 살펴야 한다. 늘어나는 평균 수명은 낮아지는 출산율을 메우고도 남을 만큼 많은 노동력을 사회에 안겨주고 있다. 중장년의 취업난도 심란한 수준이다. 이런 가운데 출산율이 높아지면 미래의 실업문제는 더욱 심각해지지 않을까? 바뀐 현실에 맞게 인생 진도표를 수정해야 할 때이다. 안광복 중동고 철학교사, 철학박사 timas@joongdong.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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