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광복 교사의 인문학 올드 앤 뉴
안광복 교사의 인문학 올드 앤 뉴 /
[난이도 수준-고2~고3] 9. 도시에는 표정이 있다 - 거리에서 시대를 읽는 법
10. 어떤 차이가 차별을 낳을까?-왕따의 사회학
11. 프랑크족의 침입에서 이슬람인들이 배운 것은? 스포츠카와 SUV를 모는 사람들은 어떻게 다를까? 스포츠카를 타는 이들은 날렵하고 도전적일 듯싶다. 덩치 큰 SUV를 모는 사람들은 모험을 좋아하는 강한 성품일 테고. 하지만 거리를 조금만 살펴보아도 이런 생각이 틀렸음은 금방 알 수 있다. 스포츠카 운전자 중에는 중후한 몸매의 중년들이 적지 않다. 하긴, 비싼 차를 몰 여유가 있으려면 그 정도 연배는 되어야겠다. SUV도 마찬가지다. 높고 두꺼운 창문 너머로 아주머니들이 많이 눈에 띈다. 안전하고 운전하기 좋아서 SUV를 고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스포츠카에서 젊음을, SUV에서는 탐험가의 근육을 떠올린다. 이런 선입견 탓에 엄청나게 많은 ‘예외’들을 제쳐버린다. 왜 그럴까? 데이비드 베레비는 이를 ‘고리효과’(looping effect)로 설명한다. 특징을 엮을 ‘고리’가 생기면, 우리 두뇌는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농구를 좋아하는 흑인과 백인 사이에는 어떤 차이점이 있는지, 동성애자는 양성애자들과 어떻게 다른지 하는 질문을 던져 보라. 우리는 순식간에 사람들을 이 기준에 따라 나눈다. 그러곤 “흑인은 ~할 거야.”, “동성애자는 ~하곤 해.” 등등의 딱지들을 붙여놓는다. 문제는 이런 구분지음이 차별로 이어진다는 사실이다. 사회학자 노르베르트 엘리아스는 차이가 차별로 이어지는 과정을 풀어 보여준다. 그는 5천명 남짓이 사는 작은 도시 ‘윈스턴 파르바’에서 흥미로운 점을 찾아냈다. 노동자들은 도시의 2, 3구역에 모여 살았다. 두 곳의 살림 형편에는 별 차이가 없었다. 그럼에도 2구역 주민들은 3구역 사람들을 깔보았다. 수준 낮고 문제만 일으키는 동네라고 말이다. 반면, 자신들이 사는 곳은 교양 있고 정감 넘치는 지역이라고 우쭐거렸다. 하지만 도시의 진짜 모습은 그네들의 생각과는 달랐다. 2구역에도 덜떨어지고 질 낮은 주민들이 있었다. 3구역 사람들은 대부분 점잖고 모범적인 시민들이었다. 아주 일부만 삐딱하고 껄렁한 모습을 보였을 뿐이다. 그럼에도 2구역 사람들은 자기 동네의 부족한 이들에게 눈길을 돌리지 않았다. 오히려 2구역 안에 몇몇 뛰어난 이들을 치켜세우며, 그들과 자신을 같은 부류라고 여겼다. 거꾸로, 3구역에서는 문제 일으키는 몇몇만 눈여겨보았다. 그러곤 3구역 전체를 예절도 없고 질서도 엉망인 동네로 몰아붙였다. 놀랍게도 3구역 사람들은 이런 평가에 발끈하지 않았다. 3구역이 더 못한 동네라는 사실을 담담히 받아들였을 뿐이다. 이렇듯 어처구니없는 일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을까? 엘리아스는 그 이유를 주민들끼리의 자부심과 응집력에서 찾는다. 2구역은 토박이들이 사는 마을이었다. 반면, 3구역은 2차세계대전 때 전쟁을 피해 온 사람들이 터를 잡았다. 어느 사회에서나 신참들이 자리 잡기는 어렵다. 전부터 있던 주민들에게는 옮겨온 이들이 마뜩잖았다. 사는 방식도, 말투도 다른 사람들이 처음부터 괜찮게 보일 리 있겠는가. 이사 온 사람들에 대한 온갖 험담이 자연스레 퍼져 나갔다. 오래된 동네에서는 소문 퍼지는 속도도 빠르다. 이웃끼리 친하기에 수다를 많이 떨기 때문이다. 그네들 이야기 속에는 묘한 거름망이 숨어 있다. 3구역 사람들을 얕볼 만한 소식이 들리면 사람들을 침을 튀기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누군가 3구역에서 훌륭한 일이 벌어졌다고 말하면 대화는 이내 잦아들었다. 사람들은 보통 듣고 싶은 말만 듣는 법이다. 자기 머릿속 편견과 맞지 않는 이야기는 애써 흘려버렸다. 더구나 3구역이 형편없어야 2구역이 얼마나 좋은 동네인지가 더 두드러지지 않겠는가. 그렇게 3구역에 대한 편견은 굳어져 갔다. 3구역 사람들은 어땠을까? 속상하기는 했지만 굳이 맞서려 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각각 딴 지역에서 왔기에 서로 친하지 않았다. 3구역에 대한 편견은 내 고민이 아니라 ‘내가 사는 마을’의 문제일 뿐이었다. 따라서 형편이 나아지면 이 지역을 뜨면 그만이었다. 소문이 안 좋아질수록 이웃 사이는 더더욱 멀어졌다. 마치 소문의 동네와 자신은 상관없다는 듯 자기 가족끼리만 지냈다. 몇몇 청소년들은 2구역의 억지에 맞서 반항을 일삼았다. 아이들은 ‘버릇없다’, ‘거칠다’는 소리를 들을 때면 더 막 나갔다. 상대방이 싫어하는 짓을 더 심하게 하는 것이 반항하는 10대의 특성 아니던가. 그럴수록 3구역에 대한 안 좋은 인상은 점점 더 굳어졌다. 2구역 사람들은 3구역을 보며 더더욱 똘똘 뭉쳤다. 우리는 저들과 다르게 교양 있고 규율 잡힌 사람들이라고 다짐하면서 말이다. 스스로 2구역 주민임을 자랑스러워하며 그에 걸맞게 행동하려고 했다. 이렇게 2구역과 3구역의 차이는 점점 벌어졌다. 엘리야스는 “윈스턴 파르바의 현실이 사람 사는 곳 어디에서나 나타난다”고 말한다. 우리 사회도 마찬가지다. 축구 선수를 뽑을 때 달리기 실력의 차이는 결코 차별이 아니다. 그러나 어느 지역 출신인지에 따라 선수를 가릴 때는 문제가 달라진다. 이처럼 정당하지 못한 차이로 차별의 벽을 쌓는 경우가 우리사회에는 너무나 많다. 피부색에서 지역갈등, 학벌에서 얼마나 땅값 높은 동네에 사는지에 이르기까지, 그 예는 셀 수 없을 정도다. 이런 우리 모습에서 3구역을 멸시하는 2구역 주민들의 모습이 자연스레 겹쳐질 테다. 데이비드 베레비는 우리에게 ‘근본속성오류’(fundamental attribute error)를 빠지지 말라고 충고한다. 자기가 늦잠 잔 것은 어제 늦게까지 공부했다는 ‘상황’ 탓이다. 하지만 남이 늦잠을 자면 ‘근본이 글러먹어’ 게으르다고 눈을 흘긴다. 이게 근본속성오류다. 우리는 과연 올곧은 눈으로 나 자신과 이웃을 가늠하고 있을까? 파이를 공평하게 자르기 위해서는, 칼자루를 쥔 사람이 남들이 모두 고른 뒤 남은 마지막 조각을 먹게 해야 한다. 조금이라도 큰 몫을 남긴다면 다른 이가 먼저 채어갈 테니까. 적절치 못한 차이가 차별로 이어지지 않으려면 이런 지혜가 필요하다. 누구라도 가장 힘없는 사람이 될 수 있는 사회가 건강한 이유다.
<기득권자와 아웃사이더> 노르베르트 엘리아스 지음, 박미애 옮김. 한길사
<우리와 그들, 무리짓기에 대한 착각> 데이비드 베레비 지음,정준현 옮김. 에코리브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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