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광복 교사의 인문학 올드 앤 뉴
안광복 교사의 인문학 올드 앤 뉴 /
[난이도 수준-고2~고3] 26. 감시와 처벌 - 세상이 감옥이 된다면
27. 관용은 폭력보다 나을까?
28. 학교 없는 사회, 학교가 학교다우려면
<자유론> , <관용>
<관용>웬디 브라운 지음/이승철 옮김, 갈무리 1865년, 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은 영국 하원의원 선거에 출마했다. 그는 정치인으로서는 꽤나 대책 없는 사람이었다. 자신의 추천인들에게 쓴 편지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저는 의원이 되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게다가 선거를 위해 돈을 쓰지 않을 것입니다. 하원의원이 되더라도 당신들을 위해 노력할 뜻이 없습니다.” 선거공약도 당시로서는 생뚱맞기만 했다. ‘여성에게도 선거권을 주자’라니, 어디 가당키나 했던 소리였던가. 현실을 아는 정치인들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나님이 출마했어도 이런 식으로는 당선될 리 없다”며 말이다. 그의 무모함은 한참을 더 나간다. 밀은 언젠가 “영국 노동자들은 거짓말쟁이들이다”라고 한 적이 있다. 밀이 노동자를 상대로 선거 연설을 하자 누군가가 물었다. “영국 노동자들이 거짓말쟁이라고 했다던데, 사실이오?” 밀은 조금도 주저 없이 답했다. “그럼요.” 그럼에도 밀은 당당하게 하원의원으로 선출되었다. 뜻한 바가 분명한 정치인은 당당하기 마련이다. 밀이 바로 그랬다. 그는 <자유론>에서 이렇게 말한다. 모든 사람들은 자기 뜻대로 말하고 움직일 자유가 있다. 자유를 옥죄어야 할 때는 한 가지 경우뿐이다. 누군가의 자유가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줄 때이다. 이른바 ‘타인 위해의 원칙’(Harm to Others Principle)이다. 아무에게도 상처를 주지 않는 일은 못하게 막아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물론, 남의 말과 행동이 눈꼴사납게 다가올 때도 있다. 선거 때 밀이 했던 말들도 그렇다. 독불장군처럼 거침없이 내지르는 소리에 속 불편한 사람도 많았을 테다. 지금도 우리 주변에는 억지스런 주장으로 속을 뒤집어 놓는 이들이 곳곳에 있다. 밀은 그럼에도 이런 사람들의 입을 막아서는 안 된다고 외친다. “인류 전체가 똑같은 생각인데도, 단 한사람이 반대한다고 해보자. 그래도 이 사람의 입을 막아서는 안 된다. 이는 한 사람이 전체 인류를 억누르는 짓만큼이나 나쁘다.” 비판이 사라진 사회는 아주 위험하다. “사람들은 눈앞의 적군이 사라지면 하던 일을 집어치우고 낮잠이나 자러 가기 마련이다.” 운동하지 않으면 근육은 금방 흐물흐물해진다. 마찬가지로 손가락질해대는 소리가 사라지면 우리의 두뇌도 금세 풀어져버릴 테다. 생각하고 고민하는 능력을 잃어버리게 된다는 말이다. 생각하는 능력이 떨어지는 사회가 건강하다고 할 수 있을까? 애먼 소리를 해대는 사람들을 오히려 고맙게 여겨야 하는 이유다. 게다가 뒤끓는 논쟁은 사회가 썩어갈 틈을 주지 않는다. 밀은 기독교를 예로 든다. 기독교는 숱한 종교들과 논쟁을 벌이며 커나갔다. 기독교인들끼리도 뭐가 과연 신의 뜻인지를 놓고 끊임없이 말다툼을 벌였다. 나와 다른 생각은 보이지 않던 점들을 보게 만든다. 기독교의 꽉 짜인 논리는 이렇게 만들어졌다. 그러나 유럽 대부분이 기독교를 믿으면서부터 문제가 생겼다. 교회는 다른 생각을 막기 시작했다. 뭔가 잘못되어 가는데도 지적하는 목소리는 좀처럼 나오지 못했다. 모두가 하나가 됐을 때부터, 교회에서는 썩은 냄새가 풍겼다. 생살을 도려내듯 날카로운 ‘다른 의견’이 왜 필요한지 알게 하는 대목이다. 어디 그뿐인가. 밀은 ‘천재에게는 자유가 필요하다.’고 힘주어 외친다. 천재란 특별한 사람이다. 그래서 그의 생각은 언제나 ‘소수 의견’일 수밖에 없다. 평범한 자들이 보지 못하는 진리를 그는 볼 수 있다. 생각을 자유롭게 펼칠 자유가 있다면 그의 생각은 널리 알려질 테다. 물론, 천재의 주장이 틀릴 때도 있다. 그래도 다른 이들의 입에서 쏟아질 옳은 소리들이 그의 잘못을 잠재울 것이다. 차이를 인정하고 자유를 소중하게 여기는 사회는 발전할 수밖에 없다. 정신 나간 소리 같았던 밀의 주장도 결국 민주주의를 성장시키지 않았던가. 밀이 내세웠던 자유는 우리에게 상식이 되었다. 이제는 자유에 더하여 관용(tolerance)이 중요하게 다가오는 시대다. 동성애자, 장애인들에 대한 차별은 범죄로 여겨지는 요즘이다. 다문화 가족을 색다르게 대하는 것도 옳지 못하다. 관용은 민주주의에서 자유만큼이나 소중하게 보듬어야 하는 가치가 되었다. 하지만 정치학자 웬디 브라운은 관용에 숨겨진 위험을 제대로 짚어낸다. 예컨대, 이슬람 등 서구 사회에서 널리 퍼지지 않은 종교를 믿는 자들은 우리가 관용을 ‘베풀어야 할’ 사람들일까? 이런 문제는 관용으로 풀어나가서는 안 된다. 이슬람 여성들은 얼굴을 가리는 히잡을 쓰고 다닌다. 기독교인들이 많은 학교에서 히잡 쓰는 것을 ‘관용’했다고 해서 차별 문제가 해결될까? 오히려 ‘너는 나와 달라’라는 인정은 무관심만 불러올 수 있다. 상대방은 단지 나와 취향이 다른 사람일 뿐이니 신경 쓰지 말라는 의미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로마제국에는 관용이 널리 퍼져 있었다. 로마인들은 자신이 지배하는 사람들이 어떤 신을 믿건, 어떤 전통 속에서 살아가건 신경 쓰지 않았다. 세금만 제대로 내고 반란을 꿈꾸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로마제국 안에서는 어떤 종교를 믿고 어떤 생각을 하건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로마가 더 이상 힘을 쓰지 못하자 제국은 산산이 쪼개졌다. 로마는 역사상 가장 넓은 땅을 다스렸던 나라다. 하지만 그들이 다스렸던 지역에는 과연 모두에게 공통된 ‘로마적인 전통’이 남아 있을까? 유럽도, 중동지역도, 북아프리카도 한때는 모두 로마제국의 땅이었다. 하지만 그 땅 위의 사람들 생각은 얼마나 서로 잘 통하고 있을까? 수백년의 역사를 함께했음에도, 그들은 제각각 다른 식구들일 뿐이다. 관용이 소중하게 여겨지는 시대다. 하지만 관용은 서로의 차이를 줄이려는 논쟁과 노력이 치열할 때만 의미가 있다. 관용과 함께 밀이 내세운 자유의 의미를 곰곰이 곱씹어 볼 일이다. 중동고 철학교사, 철학박사 timas@joongdong.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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