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광복 교사의 인문학 올드 앤 뉴
안광복 교사의 인문학 올드 앤 뉴 /
[난이도 수준-고2~고3] 27. 관용은 폭력보다 나을까?
28. 학교 없는 사회, 학교가 학교다우려면
29. 필로스와 에토스, 따뜻한 가슴은 어디에 있을까? 옛사람들은 대부분 집에서 태어났다. 집 근처의 일터에서 땀 흘리며 살다가 늙으면 집에서 죽었다. 하지만 지금 사람들은 대부분 병원에서 태어난다. 집을 떠나 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멀리 떨어진 직장에서 일을 한다. 나아가 많은 사람들은 죽음을 병원 중환자실에서 맞는다. 이처럼 현대인의 삶은 조각나 버렸다. 우리는 모든 생활이 집에서 이루어지던 때보다 더 나은 삶을 살고 있을까? 논의를 교육으로만 좁혀보자. 과연 학교교육은 가정에서의 가르침보다 나을까? 학교는 가정보다 체계 있게 아이들을 가르친다. 일과시간도 분명하고 잘 정리된 규칙도 있다. 우리는 학교교육으로 더 나은 시민이 되는 듯싶다. 그렇지 않다면 사람들이 학교 졸업장에 목을 맬 까닭이 없지 않겠는가.
<학교 없는 사회> 이반 일리히 지음, 심성보 옮김 미토
<훌륭한 교사는 무엇이 다른가> 토드 휘태커 지음, 송형호 옮김 지식의 날개
그럼에도 학교 문을 나서는 사람들에게 사회는 선언하듯 외친다. ‘인생은 공정한 게임’이라고. 그대들이 대접받지 못하는 까닭은 학교에서 공부를 못했기 때문이란다. 신세한탄을 하면, 그러기에 열심히 공부하지 그랬느냐며 손가락질을 해댈 뿐이다. 학교는 성적이라는 잣대로 어려운 형편에 따르는 차별을 흐릿하게 만든다. 게다가 학교는 배움의 기회를 빼앗기까지 한다. 전설적인 의사 화타(華陀)가 다시 살아나 병을 고친다고 해보자. 하지만 화타는 환자를 치료해서는 안 된다. 의대 졸업장과 의사 자격증이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사람에게 의술을 배워서도 안 된다. ‘자격 없는 교사’인 탓이다. 과연 교사 신분증과 전문가 자격증을 갖춘 이들만 가르칠 능력이 있을까? 이런 사람들은 되레 일에 있어서는 젬병인 경우도 많다. 건축 현장에서 몸으로 재주를 익힌 사람과 책으로만 기술을 배운 사람을 비교해 보라. 정식으로 조리사 자격증 코스를 밟은 요리사와 맛집 부엌에서 손맛을 다진 사람을 견주어 보라. 이반 일리히의 주장이 억지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을 테다. 그럼에도 사회는 교실에서 밀려나면 제대로 배울 곳이 없게 만들어 버렸다. 옛 조상들은 일터에서 몸을 부대끼며 지혜를 쌓았다. 기업들은 학교에서 필요한 인재를 길러내지 못한다고 볼멘소리를 해댄다. 그렇다면 왜 그들은 필요한 기술자들을 직접 교육시킬 수 없을까? 일터와 학교가 꼭 따로 떨어져 있어야 할 까닭이 있을까? 이반 일리히가 학교를 없애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유다. 그는 학교를 없애고 ‘네트워크 기회의 망(Opportunity web)’을 만들자고 주장한다. 네트워크 기회의 망이란 모든 사람들이 필요한 배움과 가르침을 주고받는 관계를 말한다. 인터넷 공간은 네트워크 기회의 망 구실을 하고 있다. 물음을 던지면 댓글로 도움을 주는 네티즌들이 숱하게 몰려들지 않는가. 일리히가 꿈꾸던 대가 없이 가르침과 배움을 주고받는 관계는 이처럼 현실이 되었다. 그렇다면 과연 학교는 필요 없을까? 학교는 온갖 차별을 받아들이도록 아이들을 길들일 뿐일까? 이 물음에 마음이 흔들린다면 토드 휘태커의 <훌륭한 교사는 무엇이 다른가>를 읽어 보는 것도 좋겠다. 우주선을 만든다고 해보자. 그렇다면 미국항공우주국(NASA)과 가정집, 어디를 가야 할까? 가정집에서 아무리 제대로 배운다 해도 우주선을 만들지는 못할 테다. 원하는 바를 이루려면 제대로 된 전문가가 있는 곳으로 가야 한다. 교육 전문가가 모여 있는 곳은 어디일까? 이번에는 ‘학교’라는 대답이 절로 튀어나올 테다. 문제는 학교가 과연 제대로 된 교육 전문가를 거느리고 있느냐는 데 있다. 토드 휘태커는 모든 교육의 문제는 교사의 문제라고 말한다. 제도가 아무리 훌륭해도 교사가 엉망이라면 어찌할 방법이 없다. 반면, 제도가 엉망이어도 교사가 훌륭하다면 학교는 제구실을 해낸다. 가정과 일터에서의 교육은 삐뚤어지기 쉽다. 하루 종일 같이 있다 보면 상대방의 단점에도 익숙해지기 마련이다. 배배 꼬인 부모나 직장 동료의 문제를 제대로 보기 어려운 이유이다. 교사가 제대로 된 인격자라면 문제를 제대로 짚어내어 바로잡아 줄 수 있을 것이다. “교사와 학생의 관계에서 적어도 한 사람은 어른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 어른은 교사여야 한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어른이 될 만한 교사’를 길러내고 있을까? “훌륭한 교사는 ‘희망’에 초점을 맞춘다. 평범한 교사는 ‘규칙’에 매달린다. 가장 무능한 교사는 규칙을 어겼을 때 어떤 ‘벌칙’을 줄지에만 신경을 쓴다.” 토드 휘태커의 말이다. 학업성취도에 목매는 분위기는 세계적인 추세가 되었다. 교육 시스템을 고치면 더 나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주장이 설득력 있게 다가오는 요즘이다. 하지만 제대로 된 교육매뉴얼과 확실한 성과 관리는 ‘가장 무능한 교사’의 방법에 가깝다. 사람이 하는 일의 핵심 문제는 결국 ‘사람’이다. 인간소외란 사람을 잊어버린 채 성과에만 집중하는 모습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반 일리히의 주장이 ‘삐딱한 소리’로 들리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안광복 중동고 철학교사, 철학박사 timas@joongdong.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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