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ㅣ김경림의 ‘씩씩하게 뻔뻔하게’
“엄마. 기말고사를 대면시험으로 본대. 난 못 가.”
코로나 시대에 대학 신입생이 되어 한 학기를 온라인 수업으로 보낸 큰아이의 말이다. 본인은 두 번의 암을 겪은 기저질환자이기 때문에 시험이라도 절대로 대도시의 밀집 장소에는 갈 수 없단다. 그럴 만도 했다. 긴 투병 생활 덕(?)에 아프면 아무것도 못 한다는 걸 아이는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엄마인 나는 그렇지 않을 때가 있었다. 아이의 첫 번째 암은 시력 손상으로 찾아왔는데, 진단명을 받고 치료가 시작된 뒤 내가 가장 많이 신경을 쓴 것은 아이의 시력 회복이었다. 아예 안 보이게 된 오른쪽 눈이야 그렇다 쳐도, 교정시력이 가까스로 0.01이 나오는 왼쪽 눈이 더 나빠질까 봐 전전긍긍했다. 혹시 실명이라도 하게 되면 어떻게 사나, 회진 때마다 주치의에게 “언제 시력이 돌아올까요? 더 나빠지지는 않을까요?”를 종종거리며 물었다. 주치의는 입꼬리를 내린 묘한 표정으로 그건 안과에 물어보시라 안내했지만, 안과에서도 병을 다 치료해야 알 수 있다며 모호하게 답했다.
시력 악화의 불안에서 벗어난 것은 함께 치료 중인 아이들이 눈에 들어오면서부터였다. 두 눈을 모두 볼 수 없었으나 내일을 꿈꾸며 하루를 알차게 보내는 아이가 있었고, 신체 손상은 없었으나 괴롭고 우울한 아이가 있었다. 잘 치료되던 아이가 갑작스러운 감염이나 병의 진행으로 황망하게 세상을 떠나는 것도 몇 번이나 보았다. 그때서야 주치의의 야릇한 미소가 이해되었다. 시력 걱정은 살아남은 이후에야 가능한 걱정이었다. 나는 병을 치료한 이후의 ‘완벽하고 정상적인 삶’을 꿈꾸었고, 무의식적으로 ‘당연히 살 것’을 전제했으나, 생명은 당연하지 않았다. 살아야 걱정도 하고, 회복도 할 수 있었다. 성공의 비결로 일컬어지는 ‘모두에게 중요하고 긴급한 일’이란 바로 이것이었다.
당시 큰아이의 시력만큼이나 28개월이던 작은아이의 분리불안과 애착 손상도 큰 걱정이었다. 갑자기 엄마와 떨어지게 된 환경 변화가 평생의 트라우마로 남을지 모르는데, 그런 재앙을 눈 뜨고 당하는 상황이 비통하고 속상했다. 이런 괴로움을 하소연하던 내게 소아정신과 선생님은 또 이렇게 말씀하셨다.
“건강한 아이는 걱정 마세요. 어떻게든 회복할 수 있어요. 아픈 아이에게 집중해도 돼요.”
큰아이 시력은 결국 돌아오지 않았고, 작은아이도 꽤 오래 심리적 어려움을 겪었다. 하지만 살아남은 덕에 불완전한 채 행복해지는 법을 배울 수 있었고, 건강한 덕에 성장이라는 삶의 기쁨을 맛보았다. 모든 걱정은 생명의 증거이자 살아가는 과정이기도 했다. 큰아이는 교수님께 사정 이야기를 하고 대면시험을 대체할 과제를 따로 받았다. 만약 그게 허락되지 않으면 어쩔 작정이었냐고 물으니 아이의 답은 명쾌했다.
“휴학하거나 에프(F) 받아야지. 살아남는 것보다 더 중요한 건 없어.”
김경림 ㅣ 언어치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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