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 김경림의 ‘씩씩하게 뻔뻔하게’
“으아아아앙∼” “아아아아앙∼”
경수는 센터에 처음 온 날 30분 동안 치료실이 떠나가도록 울기만 했다. 두돌 되기 몇달 전에야 겨우 걸었고, 낯선 환경을 싫어했고 말이 늦었다. 엄마는 아이의 성장을 기다리고 기다리다가 30개월 되도록 ‘엄마’ 소리를 하지 못하자 센터를 찾았다.
아이의 우는 소리를 가만히 들어보았다. 낯선 사람, 낯선 공간 자체가 아이에겐 모두 마땅찮은 듯했다. 엄마 품에 달라붙어 발악하듯 울부짖는 소리를 통해 아이는 왜 집이 아닌지, 왜 안 오던 곳에 왔는지, 저 낯선 사람은 누구인지 묻고 있었다. 슬픔보다는 원망, 서러움보다는 분노에 가까운 그 울음은 아이에겐 설명할 ‘언어’가 없다는 증거였다.
‘분노조절장애’가 있던 초등 3학년 민제는 마음에 들지 않으면 자리에서 벗어나거나 수업을 방해했고, 팔짱을 낀 채 교사를 쏘아보았다. “넌 언제 화가 나?”라고 묻자 “모르는 걸 할 때요.”라고 했다. 난독증이 있어 읽기도 쓰기도 어려운데, 학교에서는 할 수 없는 것, 어려운 것만 하라고 하니 답답함이 지나쳐 폭발했던 것이다.
아이가 화를 낼 때 어른들은 그 화를 ‘조절’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차분하고 조리 있게 원하는 걸 말하기’를 아이에게 요구하기도 한다. 그러나 언어는 배운 자, 가진 자의 것이다. 분노는 설명할 언어를 가지고 있지 않은 존재들의 몸의 소리이기도 하다. 아무리 전하려고 해도 전해지지 않을 때, 한번도 자기 말이 제대로 들려진 경험이 없을 때 아이는 ‘제발 내 이야기를 들어달라고요’라고 온몸으로 호소한다.
특정한 감정을 느낄 때 몸의 에너지가 어떤 색인지 시각화한 ‘몸-감정 지도’에서 보면 화날 때 몸은 사랑, 행복, 자부심 등의 긍정적인 감정을 느낄 때와 비슷한 색을 띤다. 환한 주황색의 이 에너지는 두려움, 불안이 나타내는 검붉은 색과는 사뭇 다르다. 나는 1년 동안 아이를 간병하느라 병원과 쉼터만 오가는 폐쇄적이고 불안한 시절을 산 적이 있는데, 백화점에서 계산 실수를 따지며 사소하게 화를 낸 뒤에 몸에 흐르는 ‘생기’를 느끼곤 놀란 적이 있다. 분노는 때로 살아 있다는 증거이자 사랑의 증거이기도 하다. 사랑이 사라진 자리에 남는 것은 미움이 아니라 차가운 외면이며 생명이 사라진 자리엔 싸늘함만 남지 않는가.
분노 뒤에 숨은 아이의 말을 들으려면 어른의 성숙한 사랑이 필요하다. 그 사랑은 아이의 울부짖음을 ‘나 힘들어’로 이해하는 능력, 거슬리는 소리와 행동을 외면하지 않고 끝까지 버티고 지켜보겠다는 굳은 의지, 내가 아이보다 더 많은 언어와 능력을 가지고 있는 어른이라는 자각, 분노는 지나가며 그것이 아이의 전부가 아니라는 믿음으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 사회가 분노사회인 것은 그런 사랑을 보여주는 어른이 없기 때문인지 모른다. 그러니 어쩌랴. 스스로가 뼈를 깎아 어른이 되는 수밖에. 아이를, 생명을, 사랑을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므로.
김경림 ㅣ <나는 뻔뻔한 엄마가 되기로 했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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