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 김경림의 ‘씩씩하게 뻔뻔하게’
“선생니이임!”
복도 저편에서 팔짝팔짝 뛰면서 아이가 손을 흔든다. 마스크 밖으로 빼꼼한 눈만 봐도 얼마나 반가운지 알겠다. “그래애애!” 마스크 밖으로 전해지라고, 나도 활짝 웃으며 힘껏 손을 흔든다.
초등 3학년 은서는 화가 나면 소리를 지르고 친구들을 때렸다. 가족사에 침입한 질병과 불화로 몇 년간 엄마를 보지 못했고, 엄마를 다시 만났을 때 엄마인 줄 알아보지 못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담임선생님이 여러 경로로 상담을 주선했다.
아이는 그림을 그리고 게임을 하는 동안 자주 어깨를 움츠렸다. 그때마다 가느다란 어깨뼈가 부서질 듯 도드라졌다. 눈을 세게 깜박거리기도 했다. 누군가는 ‘틱’이라고도 할 이 몸짓은 낯설지 않은 신경불안증세였다.
10여 년 전 큰아이가 은서만 했을 무렵, 척추뼈 사이로 항암주사를 맞았다. 잠자는 약도 마취제도 없이, 꽤 굵은 주삿바늘이 척추뼈 사이를 뚫고 들어오자 아이 몸이 갑자기 딱딱하게 오므라들었다. 엉겁결에 “움직이면 안 돼!”라고 소리치는 내게 아이는 “엄마가 이 주사 맞아 봤어?”라며 볼멘소리를 했고 나는 입을 닥쳤다. 아이가 주사 맞는 걸 몇 번이고 속수무책 지켜보다가 궁리 끝에 아이를 도와줄 방법을 하나 터득했다.
의사가 주사 키트를 들고 들어오면 우선 숨을 크게 내쉬고 손바닥 힘을 뺀 다음, 최대한 느리고 부드럽게 아이 몸에 손을 댄다. 손바닥으로 전해지는 몸의 따뜻함에 온 신경을 집중하면서 내 호흡의 속도와 깊이를 아이의 그것과 똑같이 맞춘다. 그러면 문득 침묵과 편안함이 찾아오는데, 명상과도 같은 이 ‘몰입’의 순간을 유지하고 있으면 어느새 처치가 끝나 있었다.
이 방법은 이후 내 삶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 병이 악화될까, 회복이 안 될까, 학교로 돌아가지 못할까 등등 막막한 불안이 찾아올 때마다 나는 가만히 아이의 등에 손을 얹고 따뜻한 심장 박동을 확인하고 평온을 구했다. 사람들은 내가 아이를 돌보느라 힘들었겠다고 하지만 오히려 내가 아이의 온기와 웃음에 기대어 여기까지 온 셈이다.
재난 상황에서 포유류는 서로를 찾으러 돌아다니거나 몸을 포갠 채 그 시간을 견딘다. 파충류가 구석에 혼자 처박혀 체온을 낮추는 것과 대조적이다. 트라우마 연구의 권위자 베셀 반 데어 콜크는 <몸은 기억한다>에서 다른 사람과의 유대를 신체감각에서 확인하는 것이 트라우마 대처와 회복에 얼마나 효과적인지 말한 바 있다.
은서는 제일 가지고 싶은 것으로 ‘침대’를 꼽았다. “선생님, 침대에 아주 부드러운 이불이랑 인형을 잔뜩 놓을 거예요. 우와, 얼마나 포근할까.” 생각만 해도 좋은지 은서 얼굴에는 만족감이 가득했다. 그게 자신에게 꼭 필요한 일인지 어떻게 알았을까.
은서에게 폭신한 인형을 선물해야겠다. 큰아이에게도 은서에게도, 옆에 있어서 고맙다고, 너를 만나 만질 수 있어서 나는 정말 운이 좋았다고, 시간을 놓치기 전에 꼭 말해야겠다.
김경림 ㅣ <나는 뻔뻔한 엄마가 되기로 했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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