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가 강탈해간 <조선왕실의궤>를 되찾기 위해, 민간 환수모임이 법적으로 환수를 요청하기로 했다.
조선왕실의궤 환수위(공동의장 월정사 주지 정념, 봉선사 주지 철안, 국회의원 김원웅 이하 환수위)는 8일 오전 11시 서울 중앙지법에 일본 궁내청이 소장하고 있는 ‘조선왕실의궤’ 72종의 환수를 위한 ‘민사조정신청서’를 접수할 예정이다. 그 대상은 일본왕실과 일본 정부다.
<조선왕실의궤>는 조선시대 왕실의 의례행사를 그림과 글로 정리한 기록으로, 조선시대 기록문화의 정수이며, 현재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에 지정신청되어 있는 상태다. 이 의궤는 조선시대 내내 오대산, 태백산, 적상산, 정족산 등의 사고에 보관되어 오다, 일본의 조선병탄기에 1922년 조선총독부가 일본 왕실에 기증함에 따라, 일본 도쿄 일왕궁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환수위는 2006년 일본 도쿄대가 소장한 <조선왕조실록 오대산 사고본>의 환수운동을 진행하면서, 오대산 사고에 소장되어 있던 주요문서의 행방을 조사하던 중 일본 궁내청 서릉부에 <조선왕실의궤>가 소장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지난 2006년부터 지속적으로 반환운동을 추진해 왔다. 조사결과 일본 궁내청 일왕궁에는 명성황후의 시해 이후 2년 2개월의 장례기록을 담은 ‘명성황후 국장도감의궤’를 비롯 총 72종의 왕실의궤가 보관되어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환수위 간사인 혜문 봉선사 스님은 “약탈문화재 반환의 법리적 측면과 동시에 역사적 진실을 규명하는 차원에서 조정신청에 나서게 되었다”며 조선왕실의궤의 반환운동에 주요한 전기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또한 우리나라 법정에 조정신청을 낸 이유에 대해 “한일협정의 한계를 넘어 민간 차원의 청구권이 살아 있음을 공표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과, 일본 왕실과 일본 정부에 의궤 반환의 당위성을 우리나라 법원이 공식적으로 전달하는 것을 주요한 목표로 했다”고 밝혔다.
이번 ‘의궤반환운동’은 북한의 ‘조선불교도연맹’도 동참과 지지의사를 피력했고, 지난 2월8일과 3월23일 금강산에서 2차례에 걸친 회담을 진행하여 “남북이 굳게 단합하여 지난 세기 일제가 강탈해간 문화재를 되찾아오기 위한 활동을 진행”하기로 합의하고 합의서를 체결했다.
〈한겨레〉온라인뉴스팀 이정국 기자
jg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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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왕실의궤 환수위 활동 경과
2006년 8월 8일 : 환수위 간사 ‘혜문스님’ 일본 후쿠오카의 ‘쿠시다’ 신사에 보관중인 명성황후를 시해한 칼 ‘히젠도’ 확인, ‘조선왕조실록 환수위’를 ‘조선왕실의궤 환수위’로 개편하기로 결정 2006년 8월 28일 : 환수위 공동대표 ‘김원웅 의원’이 ‘조선왕실의궤’ 반환요청 서한을 일본 아소 타로 외상에게 전달 2006년 9월 14일 : ‘조선왕실의궤환수위’ 발족식및 기자회견. 일본 대사관에 ‘조선왕실의궤 반환요청서’ 공식 전달 2006년 10월 5일 : 조선불교도 연맹 지지서한 발표 2006년 10월 6일 : 일본 궁내청 방문, 의궤 열람 2006년 11월 7일 : 프랑스에 위치한 유네스코 본부 방문, 의궤 반환문제 협의 2006년 12월 8일 : 대한민국 국회 ‘조선의궤반환촉구 결의안’ 채택 2007년 2월 8일 : 금강산 방문, 조선불교도 연맹과 제 1차 회담 2007년 3월 23일 : 금강산 방문, 조선불교도 연맹과 제 2차 회담. 남북 합의서 체결 2007년 5월 8일 : 서울중앙지법에 ‘민사조정신청서’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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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 국상도감의궤란 ?
1895년 10월 8일 명성황후는 일본공사 미우라 등 일제에 의해 계획적으로 잔혹하게 살해당했다. 살해된 명성황후는 시신조차 불에 태워져 유해조차 제대로 수습되지 못했다. 게다가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는 바람에 2년간 장례도 제대로 치르지 못했다. 이 의궤는 명성황후가 일본인들의 손에 의해 시해당한 뒤, 2년2개월간에 걸쳐 일어난 파란만장하고 유례없는 슬픈 국상에 대한 기록이다. 그래서 이 의궤는 조선시대 제작된 국장도감의궤 중 가장 길다. 현재 일본 궁내청 일황궁 서릉부에 보관되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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