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일 점심시간 쏟아져나온 직장인들이 서울 중구 무교로에서 식당을 찾아가고 있다. 류우종 기자 wjryu@hani.co
당신의 점심, 안녕하십니까
① 점심시간의 자유를 허하라
① 점심시간의 자유를 허하라
“결재받는 것 같아 스트레스”
‘열린 대화’라며 밥먹으며 회의도 근로기준법 보장된 휴게시간
직장인들 마음대로 사용 못해 “점심시간입니다만….” 유통회사에 다니는 김은아(가명·31)씨도 텔레비전 드라마 속 ‘미스 김’처럼 먹고 싶다. 하지만 방해 없이 혼자만의 점심시간을 누리는 것은 꿈같은 일이다. 시계의 분침과 시침이 동시에 12를 가리키면 은아씨는 동료 7명과 함께 사무실을 나선다. 식당에 자리를 잡자 은아씨의 손은 자연스럽게 바빠진다. 수저 놓고 물컵에 물 따르는 일은 은아씨를 포함해 일행 중 2명뿐인 여성의 몫이 돼 있다. 밥상이 차려지면 또다른 괴로움이 엄습한다. 부장은 밥 남기는 걸 유난히 싫어하고, 남성 동료들의 밥그릇 비워지는 속도는 무척 빠르다. 이런저런 분위기를 맞추다 보면, 밥이 어디로 들어갔는지 알 수 없을 정도다. 6년의 직장생활을 거쳐 그나마 지금은 나아졌지만, 직장생활 초기엔 속이 늘 더부룩했다. 밥을 다 먹으면 또다른 스트레스가 기다린다. 1시간의 점심시간 중 남은 15분. 은아씨는 책상에 엎드려 쪽잠이라도 자고 싶지만, 커피 심부름을 해야 한다. 은아씨에게 점심시간은 “일종의 눈치작전”이다. “점심시간만큼은 회사에서 독립하고 싶어요. 동료들이 싫어서가 아니라, 그 시간만은 일 얘기 하기도 싫고, 온전히 내가 쓸 수 있는 시간이었으면 좋겠어요.” 이동윤(가명·28)씨도 점심시간이 다가올수록 초조해진다. 이씨가 2년째 일하는 컨설팅회사에는 구내식당이 없다. 팀 막내인 이씨는 매일 점심 메뉴와 식당을 정해야 한다. 간단치 않은 일이다. 상사의 식성도 고려해야 하고, 최근 먹지 않은 새 메뉴를 매일같이 추천해야 한다.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점심값도 중요한 고려 대상이다. 팀 프로젝트비로 점심 식대를 대지만, 눈치껏 1인당 1만원을 넘지 않는 적정선에서 골라야 한다. 너무 싼 점심을 골랐다간 핀잔을 듣기 마련이다. “매일 고심해서 식당을 고르는데, 결국 선택은 상사가 하죠. 결재라도 받는 것 같아요. 밥도 상사와 함께 먹다 보니까 업무의 연장일 수밖에 없습니다.” 장소만 사무실이 아니고 앞에 먹을거리가 있을 뿐이지 점심시간 1시간마저 일에 빼앗기는 ‘진짜 업무의 연장’인 경우도 적지 않다. 게임소프트웨어 개발업체에 다니는 박지훈(가명·32)씨는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르겠다”며 하소연했다. “팀장이 ‘브레인스토밍’을 무척 강조해요. 점심시간에도 아이디어를 주고받죠. 팀장이야 일하기 좋은지 모르지만, 밥 먹는 시간이라도 좀 쉬어야 할 것 아닌가요? 구내식당이 또다른 사무실일 뿐입니다.” 팀장은 ‘딱딱한 회의시간이 아닌 점심시간을 활용해 팀원들과 열린 대화를 한다’고 좋아하지만, 박씨는 “유일하게 한숨 돌릴 수 있는 점심시간인데, 아무리 자유로운 분위기라고 해도 일 얘기를 하다 보면 마음이 무거워진다. 회의는 회의시간에 하면 좋겠다”고 말했다. 점심시간에 상사로부터 벗어나더라도 쉴 만한 공간이 없다면 휴식은 불가능하다. 마음먹고 회사 밖으로 나가지 않으면 기껏해야 화장실에서 쉴 수밖에 없다. 직장인 장미나(가명·31)씨는 “동료들끼리 사무실 들어가지 말고 커피라도 마시자고 하는 경우가 많다. 들어가면 일해야 되니까. 전화는 계속 오는데 안 받기가 그래서. 그런데 매일 커피를 사먹으면서 돈을 쓸 수는 없으니까 가끔은 점심 일찍 먹고 들어가면 자는 척을 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출판사에 다니는 8년차 직장인 이지은(가명·39)씨는 “휴게실이 따로 없으면 화장실 가서 쉬는 사람도 많다. 책상 앞에서 졸 수 없으니까 화장실에서라도 쉴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점심시간의 괴로움은 직장인 설문조사에서도 확인된다. 한국여성민우회가 5~6월 직장인 626명을 대상으로 벌인 점심시간 실태 설문조사를 보면, 직장인들이 점심시간에 대해 가장 바라는 것은 ‘직장관계나 업무적인 연락으로 방해받지 않는 것’(34.4%)이었다. 대부분의 직장인들이 상사·동료와 점심을 함께 먹다 보니 점심시간조차 ‘눈치’를 봐야 하는 경우가 많은 까닭이다. 2위는 ‘점심시간 동안 쉴 수 있는 휴게공간이 있었으면 좋겠다’(26.2%)였다. 근로기준법상 사업장은 4시간 노동에 30분, 8시간 노동에 1시간 이상의 자유로운 휴게시간을 보장해야 한다. 대부분의 사업장은 1시간 휴게시간을 점심시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따라서 점심시간은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어야 하지만, 실제로는 시간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노동자가 원하는 대로 이용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김창연 서울시 여성가족재단 연구원은 “휴식과 일은 확실히 구분돼야 한다. 대개 직장들이 점심시간을 법적 휴게시간을 활용하므로 그 시간은 노동자들의 재충전 시간으로 보장돼야 한다”고 말했다. 최유빈 기자 yb@hani.co.kr
직장인 4명중 1명 “점심시간 잘 지켜지지 않는다”
이유는 “일 많아서” 50% “상사 눈치 보여서” 12% 민우회, 직장인 626명 대상 설문조사 직장인들이 점심시간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이유는 업무 부담과 회사 분위기 탓인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여성민우회가 5~6월 직장인 626명을 대상으로 점심시간 실태 설문조사를 벌인 결과, 응답자의 25.2%가 ‘점심시간이 잘 지켜지지 않는다’고 답했다. 정규직의 경우 78.7%가 ‘점심시간이 잘 지켜진다’고 답했지만 비정규직은 67.4%만 ‘잘 지켜진다’고 응답했다. 점심시간이 잘 지켜지지 않는다고 응답한 직장인 중 절반(50.6%)은 ‘일이 많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어 ‘점심시간을 휴게시간으로 인정하지 않는 회사 분위기’(30.4%)나 ‘상사의 눈치’(12%)를 이유로 꼽았다. 이밖에 “점심시간을 엄격하게 지키지 않고 다 같이 밥을 먹고 바로 일을 한다”거나 “사무실에서 밥을 해먹는데 전화가 오면 받아야 해서”라고 응답한 직장인도 1명씩 있었다. 한 직장인은 “(점심시간인데도) 무의식적으로 앉아서 일을 하고 있다”고 답하기까지 했다. 점심시간은 1시간인 경우가 75.1%로 가장 많았다. 정규직은 80.9%, 비정규직은 64.2%가 1시간의 점심시간을 쓰고 있었다. 비정규직의 23.9%는 점심시간이 1시간 미만이라고 답해, 정규직(10.5%)에 견줘 비중이 갑절이 넘었다. 점심시간이 아예 없다는 응답자는 19명이었는데, 이 가운데 12명이 비정규직이었다. 민우회는 17일 이러한 내용의 설문조사 결과를 발표하고 무급으로 규정된 점심시간을 유급화하는 운동을 벌여갈 계획이다. 최유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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